신흥무관학교는 서간도 일대 대표적인 독립군 양성 기관이었다. 이 학교 졸업생들은 1913년 5월 6일에 독립운동의 조직적 전개와 신흥무관학교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서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에 자리한 신흥강습소에서 신흥교우단을 창단하였다. 신흥교우단은 “혁명대열에 참여하여 대의를 생명으로 삼아 조국 광복을 위해 모교의 정신을 그대로 살려 최후 일각까지 투쟁한다”는 설립 목적을 세웠다. 5월 10일에 신흥강습소에서 제1회 임시총회를 열었는데, 이 때 단원 25인이 참석하였다. 그 뒤 9월 15일에 기관지로 신흥교우보를 발행하였다. 이 신문은 만주 일대 한인들의 계몽지로 기능하였다.
신흥교우보는 갱지(更紙)에 등사하여 제작하였는데, 크기는 가로 17.7㎝, 세로 26.2㎝이다. 편집 겸 발행인은 강일수(姜一秀)였고, 발행소 및 발행지는 통화현 합니하 신흥강습소였다. 신문에는 논단, 강단, 학원, 소설, 문림(文林), 축사, 잡조(雜俎), 회중기사 등이 차례대로 실렸다.
신흥교우보는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서 교육부재를 타파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곧 강일수는「간도동포를 향하여 자제교육을 권고함」이라는 글에서 “나라의 흥망성쇠가 바로 민족교육을 어떻게 실시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며, “경술국치를 당한 우리 민족이 반성해야 할 것은 눈물로 세월을 보낼 것이 아니라 강한 군대를 조직하기 위한 인적 자원 배출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 글은 우리 민족의 연원을 단군에서 찾아 민족사의 뿌리를 오늘날에도 잇게 하고, 이를 깨울 수 있는 자들이 바로 교육을 잘받은 청년들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편 신흥교우보에는 애국계몽기 사회진화론의 영웅사관을 그대로 전재한 경우도 많았다. 곧 “역설적으로 강한 나라의 침략을 받은 우리 민족이 강한 민족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사의 영웅들을 본받아 거대한 국제조류, 즉 제국주의 시대에도 흔들림 없이 거친 파도를 이겨낼 훌륭한 ‘키잡이’들을 지속적으로 배출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다만 애국계몽기에는 1인의 영웅만이 강조되었던 반면, 이 신문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강력한 혁명의 열기로 뭉친 열혈남아의 역할을 부각하였다.
신흥교우보는 단순히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조직한 신흥교우단의 기관지라는 의미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메카는 여기다”는 것을 선전하려는 매체임을 전세계 한인에게 알린 간행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