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과 신민둔에 산재한 농민들의 구제자금 지급과 농자재 구입 및 생활안정을 도모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이주 한인들에 대한 경제적 예속과 통제 수단으로 설립되었다.
한인들은 먼저 발기회를 만들고 이를 통하여 봉천 거류민회, 권업공사, 협제공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1931년 2월 10일 봉천농무조합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창립총회를 통하여 임시의장을 선출하고 각 구의 대의원을 선발하였다. 이들 대의원은 대부분 거류민회의 구성원으로서 심양 외곽지역의 한인들은 이를 통하여 시내와 연결할 수 있는 고리를 구축하였다.
봉천농무조합은 봉천거류민회 내에 농업에 종사하는 조선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조합의 사무소는 봉천십간방 제2구 협제공사에 두었다. 임시 회의를 거쳐 조합장에 김보영(金保榮), 부조합장 이영방(李永芳), 이사 임한용(林漢龍), 서기 장의환(張義煥)이 선출되었다. 비료 및 농구의 공동구매, 부업장려 및 추수시 곡물 매입에의 개입을 통하여 이주 한인 농민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하였다.
일본영사관 영향 하의 만주조선인친애의회(滿洲朝鮮人親愛義會), 공영사(共榮社)와 같은 유사단체들이 설립되면서 일제는 열악한 이주 한인의 경제력을 담보로 한인사회를 장악해 나갔다. 봉천조선인농무조합은 표면상으로는 한인들에 의해 설립된 단체였으나 실상은 일제가 봉천지역 이주한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한 단체로서 한인들의 이주생활을 강제하거나 결정했다. 한인들은 일제의 생활지원을 받았으며, 일제는 이를 빌미로 한인사회를 통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