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간도 지역 민족교육기관은 일제의 ‘간도침략’으로 대부분 파괴되었다. 여준(呂準, 1862∼1932)은 일찍부터 이 지역에서 서전서숙(瑞甸書塾)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세워 후진 교육에 힘썼는데, 한인 이주지역으로 주목받았던 길림성 액목현(額穆縣)에 교육기관을 설립하려는 뜻을 점차 구체화하였다. 1922년 그는 액목현에 민족교육기관인 검성학장을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뒤에 검성중학으로 발전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 지역에는 많은 독립운동 단체가 성립하였다. 이들 단체는 독립운동을 이끌어 나갈 인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1922년 독립운동가 양성과 민족교육 실시를 목적으로 검성학장이 설립되었고, 뒤에 검성중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23년에 1회 졸업생이 배출되었으며, 1927년에는 청년운동의 발전을 통하여 청년강습소로 고쳐 불렀다가 1930년에 폐교되었다. 현재 길림성 교하시(蛟河市) 남강자에는 1947년에 설립된 신강소학교가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민족교육기관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는 산실이었다. 검성중학은 독립운동가 여준이 교장을 맡아 관여하면서 항일민족교육을 실시하였기에 독립운동에 투신할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설립 초기에는 신흥무관학교 교관이었던 오광선(吳光鮮, 1896∼1967)이 체육 교사를 맡았고, 오일선 등도 교사로 활동하였다. 학생은 대체로 70여명이었는데, 많을 때는 100여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교과목으로는 한국어, 영어, 수학, 동국지리, 대동역사 등이 있었고, 군사훈련과 반일사상교육도 진행하였다. 학생들은 오전에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노동을 하였다.
검성중학은 서북간도 지역에 집중되었던 민족교육기관의 외연을 확대하였으며, 액목현 지역 항일민족교육기관의 중심으로 기능하였다. 특히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반일청년회 등 반일단체를 조직하여 일제에 대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