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서농장이 위치한 곳은 백두산 서쪽편 산록 사방 200여 리에 달하는 무인지경의 고원평야로서, 도로라고는 오소리 · 산돼지 · 곰 · 노루 등이 다니는 길밖에 없을 정도로 깊은 산 속에 위치해 있었다. 신흥학우단에서는 이곳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1914년 가을부터 인력과 물자와 금력을 동원, 벌목을 하고 수천 명의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병영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각 건물을 장주실(莊主室) · 훈독실(訓督室) · 총무실 · 의무실 · 수품실 · 농감실(農監室) · 교도실 · 강당 · 중대장실 · 소대장실 · 치료실 · 식당 · 취사실 · 창고 등과 각 부대의 병사실 등으로 나누었다. 아울러 신흥중학의 제1회부터 제4회 졸업생 일부와 각 분교, 노동강습소 등에서 훈련된 군인 385명을 입영시켜 부대편성을 완료하는 동시에 본격적인 군사훈련에 돌입하였다.
또한 임원진도 선출하였는데, 장주(莊主) 김동삼(金東三), 훈독(訓督) 양규열(梁圭烈), 총무 김정제(金定濟), 의감(醫監) 김환(金煥), 경리 김자순(金子淳), 수품(需品) 곽문(郭文), 의무 정선백(鄭善伯), 농감(農監) 백광운(白狂雲), 교관 허식(許湜) · 김영윤(金永胤) · 김동식(金東植) · 강보형(姜保衡), 교도대장 이근호(李根浩), 제1중대장 안상목(安相睦), 제2중대장 박상훈(朴相勳), 제3중대장 김경달(金敬達) 등이었다.
이들 가운데서 군사훈련과 교육은 훈독인 양규열의 감독 밑에 시행되었으며, 일반 작업과 농사는 장주인 김동삼의 지도 밑에 농감인 백광운이 지휘를 하였다. 그리고 이 농장의 간부들과 구성원들은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기후와 풍토가 맞지 않고 음식물까지 부족해 구성원들이 속속 병에 걸리기 시작하였다. 그밖에도 신경쇠약 · 불면증 · 열병 · 위장병 · 심장병 · 천식 · 결핵 등으로 고생하는 이들이 잇달아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치료차, 또는 무작정 떠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고, 그 결과 병사(兵舍)가 비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부민단 간부들은, 3·1운동 후 부민단이 해체되고 한족회(韓族會)가 조직되는 과정에서 총회를 열고 이 농장을 해체하기로 결정,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