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치용(穉用), 호는 해관(海齧). 서울 출생. 아버지는 연안부사 이승위(李承緯)이며, 어머니는 경주최씨(慶州崔氏)이다. 1895년 감역(監役) 유석기(柳奭基)의 장녀 유중권(柳重權)과 혼인하였다.
1900년 육군무관학교 보병과에 입학해, 1903년 9월 졸업한 뒤 육군 보병참위(參尉)에 임관되었다. 1905년 육군연성학교(陸軍硏成學校)에서, 1906년 진위대(鎭衛隊) 제7대대에서 근무하였다. 그리고 1907년에는 육군 보병 부위로 승진해 진위대 제2대대에서 근무하였다.
군대해산 후 이상설(李相卨)과 이회영(李會榮)의 국민교육운동에 뜻을 같이 해 1908년부터 1909년에 걸쳐 경상북도 안동에 있는 협동학교(協同學校) 교사로 김동삼(金東三)·하중환(河中煥)·유인식(柳寅植) 등과 함께 일하였다.
1907년 신민회(新民會)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1910년 9월 신민회의 계획에 따라 이회영·이동녕(李東寧)·장유순(張裕淳) 등과 함께 백지(白紙) 장사를 가장해 독립운동기지의 선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1912년 봄 봉천성(奉天省) 통화현(通化縣)에 재만한인의 자치기구인 경학사(耕學社)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해 경학사 소속 무관양성기관인 신흥학교(新興學校) 개교 때 교두(敎頭)로 군사학을 담당하였다.
1912년 가을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장유순의 동생 장도순(張道淳)과 함께 국내로 파견되었다. 귀국한 뒤 안확(安廓)의 집을 근거지로 군자금 모금을 전개했지만 여의치 않자 장도순은 만주로 돌아가기로 하고 이관직은 국내에 머무르면서 군자금을 구해 1년이나 2년 뒤에 만주로 가기로 하였다.
1913년 이회영이 귀국하자 이회영을 도와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전개되자 배재학당(培材學堂)의 학생동원 책임자로 활동 중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낙향해 기독교에 귀의, 충청남도 공주에 있는 광정성결교회(廣亭聖潔敎會) 집사로 신앙생활을 하다 죽었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