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한 군부세력은 단일한 세력이 아니었다. 김종필 중심의 육군사관학교 8기생 중심의 세력이 박정희 소장과 연합하여 주류를 이루고는 있었지만 비주류 세력의 힘과 영향력도 만만치 않았다. 이에 주류 세력은 각종 반혁명 사건을 일으켜 반대파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반혁명 사건은 5·16 군사정변 이후 불과 두 달도 되기 전인 1961년 7월 9일 발표된 장도영 제거 사건이었다. 장도영과 주요 관련자들의 고향이 평안도 일대였기 때문에 일명 ‘텍사스 토벌작전’으로 불리기도 하는 장도영 제거는 이미 군사정변 초기부터 준비된 것이었다. 장도영은 5·16 군사정변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라는 요직에 있으면서 군사정변 진압에 소극적인 모습이었고 박정희와 육사 8기 세력에 의해 군사정변 영수로 추대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장도영이 자신들의 권력 장악에 걸림돌로 작용한다고 판단한 군사정변 주체세력은 그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이에 군사정변 당시 병력을 동원했던 문재준 대령과 공수단의 박치옥 대령까지 포함해 반혁명 사건 음모 혐의로 구속하여 제거하였다. 박정희는 직접 재판정에까지 출두하여 장도영의 반혁명 음모에 대해 증언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반혁명 사건은 군 내부가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민주당 등 구 정치권 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것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1962년 6월 1일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종필에 의해 발표된 구민주당계 반혁명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민주당 조직부장 출신의 조중서가 무력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는 혐의로 민주당계 주요 인사를 구속했던 사건이었다. 비슷한 사건으로 세칭 ‘이주당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구 민주당계 인사들이 이주당을 만들어 장면 총리까지 연루된 반혁명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발표된 사건이었다.
1962년은 민정이양을 앞두고 쿠데타 주도세력 내부에 경상도파와 함경도파, 민정참여파와 불참파, 김종필계와 반김종필계 등으로 나뉘어 치열한 내부갈등과 권력투쟁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특히 군 내부는 장도영 중심의 평안도 세력이 제거된 후 박임항, 박창암, 김동하 등의 함경도 출신 인사들의 영향력이 막강한 상황이었다. 이에 박정희 중심의 주류세력은 이들을 제거할 필요성을 느끼고 세칭 ‘알래스카 토벌작전’을 추진했다.
1963년 3월에 군 일부 반혁명 음모 사건으로 발표되면서 세상에 알려진 이 사건으로 박임항을 필두로 김동하, 박창암, 이규광 등 총 21명이 쿠데타를 음모했다는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박임항은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구형 받았으나,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하던 중 3년 뒤에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나머지 인사들도 대부분 짧은 수감기간을 거쳐 석방되었고 이후 박정희에 의해 이런저런 공직에 자리를 잡기도 했다.
위 사건을 포함해 5·16 군사정변 이후 반혁명 혐의로 발표된 사건은 대략 10여건 내외였는데, 대부분의 관련자들은 짧은 복역 기간을 거쳐 석방되었다. 즉 대부분의 반혁명 사건들은 군사정변 주도세력 내부의 갈등이 표출된 것이었고 박정희와 김종필 중심의 권력구조가 강화되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