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희(朴元熙)·정종명·김필애(金弼愛)·정칠성(丁七星)·김현제(金賢濟)·홍순경(洪順卿)·오수덕(吳壽德)·고원섭(高遠涉)·우봉운(禹鳳雲)·지정신(池貞信)·주세죽(朱世竹)·김성삼(金聖三)·허정숙(許貞淑)·이춘수(李春壽) 등이 1924년 5월 4일 발기하여, 5월 10일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종래의 계몽적 여성교육론을 비판, 지양하고 사회주의적인 여성해방론을 주장하였다. 선언문에 의하면 “여자는 가정과 임금과 성의 노예가 될 뿐이오, 생활에 필요한 각 방면의 일을 힘껏 하여 사회에 공헌하였으나 횡포한 남성들이 여성에게 주는 보수는 교육을 거절하고 모성을 파괴할 뿐이다. 더욱이, 조선여성은 그 위에 동양적 도덕의 질곡에서 울고 있다. 비인간적 생활에서 분기하여 굳세게 굳세게 결속하자”고 되어있다.
강령은 ① 사회진화법칙에 의한 신사회의 건설과 신여성운동에 설 일꾼의 훈련과 교양을 기함 ② 여성해방운동에 참가할 여성의 단결을 기함 등이다. 창립 초기에는 사회주의여성운동에 대한 사회적 호응이 극히 미약하여 발회식에는 발기인 외의 여성참석자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창립 2년여 만에 회원이 70여 명으로 늘었다.
그들은 무산계급의식을 고취하는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사회주의계의 파벌분쟁과 연결되어 경성여자청년동맹과 경성여자청년회로 분파되어 활동이 미진하여졌다.
1926년 민족유일당운동이 추진되는 가운데 동경유학생 황신덕(黃信德)·이현경(李賢卿)·정칠성 등이 귀국하여, 여성동우회를 중심으로 사회주의여성운동을 통합하여 활성화되어 갔다. 그 뒤 1927년 여성단일단체인 근우회(槿友會)가 조직되자, 이를 중심으로 사회주의여성운동을 전개하여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