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 ()

김홍도필 풍속도화첩 중 신행
김홍도필 풍속도화첩 중 신행
가족
개념
사회가 인정하는 절차에 따라 이성이 결합하여 부부가 되는 사회현상. 결혼.
이칭
이칭
결혼
정의
사회가 인정하는 절차에 따라 이성이 결합하여 부부가 되는 사회현상. 결혼.
개설

혼인은 일정한 사회적 규정의 제약 속에서 행해진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발견되는 규정으로는 근친금혼이 있다. 근친금혼의 출현시기와 발생원인은 분명하지 않으나 금혼의 대상을 규정하는 방식은 민족과 문화마다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민법에 의거하여 혼인이 금지된 근친의 범위는 ① 8촌 이내의 혈족(친양자의 입양 전 혈족을 포함한다) ② 6촌 이내 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6촌 이내 혈족, 배우자의 4촌 이내 혈족의 배우자인 인척이거나 이러한 인척이었던 자 ③ 6촌 이내 양부모계(養父母系)의 혈족이었던 자와 4촌 이내 양부모계의 인척이었던 자로 되어 있다.(민법 제4편 친족 제3장 혼인 제2절 혼인의 성립 제809조 [근친혼 등의 금지])

우리나라 혼인제도의 변화과정을 추적하는 것은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주제이다.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서『삼국지(三國志)』위서 동이전에 기술된 혼속(婚俗) 관련 자료를 토대로 미루어볼 때 삼국시대 이전부터 일부일처제를 근간으로, 모처·부처제(母處父處制) 거주규정을 가졌고, 아들과 딸을 대등하게 취급하는 우리나라 특유의 혼인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혼인제도의 기본 골격은 삼국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되었으며, 사유재산 및 신분제의 발달과 더불어 귀족사회를 중심으로 일부다처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려 또한 삼국시대의 혼인제도를 답습하여, 근친혼 및 모처·부처제 거주규정이 계속 유지되었다.

혼인제도상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중기로, 원나라의 침략을 받은 이후 공녀제도(貢女制度)가 시행됨에 따라 조혼풍속(早婚風俗)이 생겨났다. 보다 뿌리깊은 변화는 고려 말 주자학의 전래와 그에 따른 명률(明律)의 보급으로 인해 동성동본불혼제도(同姓同本不婚制度)가 도입되면서 진행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당시 귀족들 사이에 성행하던 일부다처제 문제가 거론되어 처첩(妻妾)을 구별하고 서얼(庶孼)을 차별하는 제도가 시행되었다. 거주규정 문제는 조선 초기부터 논란이 되다가 조선 중기에 이르러 더욱 큰 시비와 갈등의 대상이 되었다. 중국식을 모방하려는 조정의 시도는 관철되지 못했고, 절충안이 모색되는 동안 가부장권(家父長權)의 강화 및 조혼·중매혼이 성행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전통적 혼인제도라 여겨지는 형태는 대체로 조선 중기 이후에 성립된 것으로서, 일제강점기를 지나 광복 이후 서구의 제도 및 사상이 유입되면서 전통적 혼인형태에도 급격한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이 시기의 주요한 변화로는, 봉사혼(奉仕婚)·구매혼·솔서혼(率婿婚) 등이 크게 약화되고 만혼(晩婚)·연애혼 등이 성행하게 되며, 일부다처제가 거의 소멸되었음을 들 수 있다.

강력한 부계혈연중심 가부장제 가족의 근간이 되었던 호주제와 동성동본불혼제는 폐지되었고, 현재는 전통적 가족공리주의와 서구식 혼인관에 입각한 낭만적 혼인의 공존이 이루어지고 있다. 더불어 이혼 및 재혼의 증가, 단독가구 및 무자녀 부부가족, 동거 등 다양한 혼인유형이 나타나고 있고, 1990년대 이후에는 국제결혼을 중심으로 다문화가족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혼인의 역사

고대의 혼인제도

문헌 및 사료의 허용범위 내에서 고대의 혼인제도를 추론해보면, 신라시대는 현재의 규범과는 매우 다른 혼인 관행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삼국사기(三國史記)』와『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초기 박씨(朴氏) 왕실시대 제7대 일성이사금의 부인은 박씨로, 왕과 같은 성의 소유자이나 촌수관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제8대 아달라이사금의 부인은 지마이사금의 딸로, 지마는 아달라와 사촌간이기에 아달라는 오촌질녀와 혼인한 것이 된다.

석씨(昔氏) 왕실시대에는 3건의 동성혼이 있어, 제10대 내해이사금은 사촌여동생과, 제11대 조분이사금은 내해의 딸인 오촌질녀와, 그리고 우로(于老)는 육촌여동생과 혼인하였다.

신라 상대(上代)에 속하는 내물왕계 김씨(金氏) 왕실시대에는 김말구(金末仇)와 휴례(休禮)의 혼인만 계보가 분명치 않은 김씨간 혼인이었고, 6조의 혼인은 모두 계보를 추적할 수 있는 근친혼이었다. 곧 내물이사금과 실성이사금은 사촌동생과, 눌지마립간은 이종사촌여동생과, 눌지의 동생인 습보(習寶)는 질녀와, 자비마립간은 사촌여동생과, ]소지마립간은 오촌숙모와 혼인하였다.

신라 중대(中代)에 속하는 지증왕계 김씨 왕실시대에는 3건의 근친혼이 있어, 법흥왕의 딸은 삼촌인 입종(立宗)의 부인이 되었고, 진흥왕의 아들 동륜(銅輪)은 고모와 혼인하였으며, 무열왕의 아버지 김용춘(金龍春)은 칠촌질녀와 혼인하였다.

신라 하대(下代)에 속하는 원성왕계 김씨 왕실시대에는 4건의 근친혼이 있어, 제41대 헌덕왕은 4촌 누이동생과, 제42대 흥덕왕은 질녀와, 제43대 희강왕은 6촌 여동생과, 그리고 희강왕의 아들인 김계명(金啓明)은 6촌 여동생과 혼인하였다. 신라 하대 후기인 제48대 경문왕으로부터 제56대 경순왕에 이르는 시대에는 김효종(金孝宗)이 같은 성인 김계아(金桂娥)와 혼인을 하였으나 촌수는 분명하지 않다.

이상 신라왕실에서는 근친혼이 빈번하여 질녀 및 숙모와의 혼인에서 볼 수 있듯이 부부는 같은 세대에 속해야 된다는 세대원리가 지켜지지 않은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더불어 신라시대에는 왕실 및 귀족계급에서 일부다처제와 첩제(妾制)가 행하여졌음을 여러 기록에서 볼 수 있다.

고려의 혼인제도

『고려사(高麗史)』열전후비편(后妃篇)·종실편(宗室篇)·공주편(公主篇)에는 태조 1세(世)로부터 16대가 계속되는 전(全)고려사를 통해 63건의 동족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촌수별로 집계해 보면, 이복 형제자매간 10건, 이복 3촌 조카 간 3건, 친4촌간 6건, 이복4촌간 9건, 친5촌 조카 간 1건, 이복5촌 조카 간 3건, 친6촌간 3건, 이복6촌간 2건, 이복7촌간 1건, 친8촌간 4건, 이복8촌간 2건, 9촌 조카 간 1건, 10촌간 2건, 11촌간 2건, 12촌간 2건, 13촌간 3건, 14촌간 1건, 15촌간 2건, 그리고 16촌간, 17촌간, 18촌간, 19촌간, 24촌간, 26촌간 각 1건씩으로 나타났다. 이들 총 63건의 동성혼 및 동족혼 중 8촌 이내의 근친혼이 44건으로 전체의 69.8%에 달하였고, 특히 4촌 이내 혼인이 28건이나 된다.

신라시대와 구분되는 고려시대만의 특이한 현상으로는 이복형제자매간 혼인이 10건이나 된다는 사실이다. 이복형제자매는 어머니만 다르고 아버지는 같기에 신라시대의 3촌간 근친혼보다 더욱 가까운 사이라 하겠다. 이복4촌혼도 9건이나 되는 것으로 미루어 이복간 혼인이 신라시대에 비해 빈번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 신라시대 이후부터 고려 초기에 이르기까지는 왕실에서 근친혼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를 왕실 및 귀족사회만의 특수한 현상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일반 서민사회에서도 일반적으로 나타났던 현상인지 여부는 학계에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당시 일반서민의 혼인습속을 규명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나 문헌이 없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근친혼을 둘러싼 논쟁에 대해 확정적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다.

고려시대에도 왕후귀족과 일반 권문세가에서 다처(多妻)·축첩(蓄妾) 습속이 성행하였다.『고려도경(高麗圖經)』잡속조(雜俗條)에 의하면, “고려 조정에 잉첩(媵妾: 귀인의 시중을 드는 첩)이 있고 관료에게 첩이 있으니, 이들은 서민의 처나 잡역에 종사하는 비(婢)와 비슷한 복식을 했다. 부잣집에서는 3∼4인의 처를 취하였는데 이들은 자녀를 출산하면 별실(別室)에서 산다”고 하였다. 이들 기록을 통해 추론컨대 고려시대에는 다처제와 축첩제가 병존하였으며, 서처(庶妻)를 적처(嫡妻)와 다름없는 신분으로 인정하는 습속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혼인제도

조선시대는 왕조 건립 초기부터 배불양유책(排佛揚儒策)과 더불어 중국으로부터『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를 들여와 국법의 기초로 삼음에 따라 동성동본혼을 엄하게 규제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신라 및 고려시대에 발견되던 다처제 형태는 점차 사라지고 본처와 구분되는 첩제가 제도화되었다. 중국식 예교의 도입에 따라 적서(嫡庶) 구분을 명확히 하여 동시에 두 명의 적처를 둘 수 없음을 명시하고, 정적(正嫡) 이외의 서처는 첩 신분으로 전락시켰다. 1413년(태종 13)에는 중혼금지 법령이 제정되었는데, 사실상의 다처제 관행은 그 이후에도 존속했던 것으로 추론되며, 다처제 관행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중종시대 이후의 일이다.

첩제의 확립과 더불어 적서 차별은 더욱 강화되어,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 제정을 통해 서자의 과거 응시를 불허하는 등 신분·출세·재산상속에 있어 심한 제약을 가하였다. 제례(祭禮)에 있어서도 정처가 사망한 뒤 개취하면 후처도 선처와 마찬가지로 적처의 대우를 받도록 하되, 선후 두 처만 사당에 모시고 첩은 서자가 별실에서 따로 제사하도록 하였다. 이토록 엄격히 적서를 차별함은 축첩을 억제하는 면이 있었으나, 가계계승을 존중한다는 이유로 예(禮)·법(法)에서는 첩제를 공인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그러나 첩의 신분은 비천함을 면치 못하여 천첩(賤妾)은 물론 양첩(良妾)이라 할지라도 남편을 부군(夫君), 적처를 여군(女君)이라 칭하였으며, 적자에 대해서는 노비가 상전의 자제를 대할 때 쓰는 호칭인 서방님·도련님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첩제를 공인한 것은 가계계승의 목적에 기인한 것이나, 실제로는 탐색(貪色)과 방종 때문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축첩은 상류계층에서 보다 성행하였지만 일반서민들에게까지도 확산되어, 처와 첩간의 반목질시와 그들 후손간의 잦은 분쟁 등으로 인해 사회문제를 야기하기도 하였다.

혼인 유형

배우자 선택과정에 따른 혼인 유형

자유혼

자유혼이란 혼인 당사자인 신랑·신부가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배우자를 선택하여 혼인하는 것을 말하며, 이 때 사랑이 혼인의 주요한 토대가 되기에 연애혼이라고도 한다.

연애혼은 근대 서구사조의 영향으로 도입된 것이란 인식이 지배적이나, 신라시대에 이미 상류사회를 중심으로 연애혼을 행한 흔적이 남아 있다. 신라의 고대설화 중에는 남녀간 사랑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 남녀간 자유로운 교제에 기반한 연애혼도 존재하였으리라 추정된다. 연애혼은 조선시대에 유교적 규범이 도입되면서 자취를 감추다가 1920년대 식민지 시대 신여성을 중심으로 연애혼이 유행된 이후 현대사회로 들어서면서는 주류를 이루는 혼인유형이 되고 있다.

중매혼

중매혼은 혼인 당사자의 의지보다 부모나 가문의 의사에 따라 이루어지는 혼인을 말하며, 조선시대 이래 유교식 가례(家禮)의 영향으로 널리 보급되어 전통사회의 전형적 혼인유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중매혼은 가부장제 가족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며 조혼과도 관계가 깊다.

중매혼의 특징은 혼인 결정권자가 혼인당사자가 속한 가족의 가장이라는 것과 양가의 의견을 조정하는 중매인이 있다는 것이다. 중매혼은 외혼제이므로 혼인할 양가가 상대방을 상세히 모르기에 중매인의 구실이 중요하다. 중매인을 부르는 명칭은 흔히 중매쟁이·중매꾼이라 하지만 지방에 따라서는 중신애비·중신꾼·매파·매쟁이 등 다양하게 불린다. 중매인에게는 존칭 대신 낮춤말을 쓴다.

중매인은 다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정보중매인이다. 부녀자들의 외부출입이 엄격히 규제되었던 때에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여자들의 필수품을 파는 보상(褓商)들이 규수나 신랑감을 소개하는 중매인 구실을 하였다.

둘째 정식중매인이다. 기본적인 양가의 정보가 교환되고 나면 양가를 내왕하며 양가의 의사를 조정하고 중요한 문서의 교환을 담당한다. 일반적으로 중매쟁이라 하면 이들 정식중매인을 지칭한다.

셋째 기타중매인이다. 이들은 양가 중 어느 한편을 잘 아는 사람이거나 남자 쪽 근친일 수도 있고, 옛날 반촌(班村)에서 자질구레한 일을 담당하던 문중 하인도 있다. 상대방에 대한 보다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양가에서 가장 신임하는 사람 또는 부모가 직접 나그네로 가장하여 상대방 마을에 가서 상대방의 가족과 인물됨에 대하여 상세한 정보를 염탐하기도 한다.

중매혼에는 선을 보는 과정이 수반되는데, 과거에는 신랑될 남자가 동행하지 않고 신랑의 어머니와 근친의 여자들이 여자집에 가서 규수를 직접 만나보는 형식이 주를 이루었고, 오늘날은 남녀가 맞선을 보는 경우가 많다.

중매혼 과정에서는 어머니가 큰 구실을 하지만, 최종결정은 혼인당사자의 아버지가 내린다. 특히 대종가(大宗家)의 종손일 경우 문중 회의를 열어 혼사를 결정하기도 한다. 중매혼의 경우 혼인을 결정함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궁합(宮合)이 있다. 궁합은 과거에 매우 중요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혼인 요건에 따른 혼인 유형

구매혼

구매혼(購買婚)이란 신랑집에서 일정한 신부대금을 지불하고 신부를 맞이함을 의미한다. 실례로 강원도에서는 신부대금으로 300∼600냥이 필요하고, 아이가 있는 과부를 얻으려면 150냥, 데릴사위를 얻으려면 100냥이 필요하였다고 한다. 함경도의 하층계급 농민들 사이에서도 남자집에서 여자집에 돈을 주고 약혼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일제강점기 조사에 따르면, 전라북도 고창에서는 신부집에서 혼인할 때 최저 60원, 최고 150원을 요구하는 풍속이 있었다고 하며, 황해도에서는 신부가 불행에 대처할 예비금을 명분으로 내세워 신부대금에 해당하는 몸값으로 나이 한살에 10원 정도를 받았다고 한다.

다만 근년에는 신랑측에서 신부측에 물품이나 금전을 지불하더라도 구매행위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며, 양가 간에 혼인을 약속한 이후 보내는 예물의 성격이 강하기에 구매혼보다 예물혼(禮物婚)에 해당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예물혼적 성격을 보여주는 예로서는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예물을 보내는 ‘봉치’라는 관행이 존재하고 있다. 이를 전라남도 구례에서는 ‘징보내기’, 고흥에서는 ‘송복(送服)’, 제주도에서는 ‘이받이’라 하는데,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사주를 보낸 다음, 함을 보내기 전에 날을 잡아 예물을 보내는 것으로, 납채 또는 납폐에 해당한다 하겠다.

봉치 또는 송복의 내용물은 지방에 따라 달라, 전라남도 고흥에서는 신부용 사철옷감, 이불감·솜·누룩·소금·쌀·광목·명주 등을 보냈고, 동래에서는 신부의 저고리·치마 각 세벌, 이불감·솜·신부용 패물, 그리고 ‘조금돈’이라 하여 혼례식 비용을 보냈으며, 제주도에서는 수퇘지 한 마리, 닭 두 마리, 달걀 100개를 신부집에 보냈고, 경기도 양반집에서는 명주·광목·비단·패물 등을 보냈다.

정상적 예물혼 이외에 돈을 받고 딸을 파는 실질적 구매혼도 있었다. 하층계급에서 많은 자녀를 양육할 능력이 없고 특히 흉년이라도 들면 딸을 민며느리로 팔았으며, 돈을 받고 첩으로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봉사혼

봉사혼(奉仕婚)이란 신랑될 남자가 혼인요건으로 일정기간 여자집에서 봉사를 한 후 혼인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신부대금을 치를 수 없는 사람이 노력봉사로 대신하는 것이기에 구매혼의 한 형태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신랑의 봉사기간을 신부집에서 신랑 능력을 시험하는 기간으로 해석하고 신부대금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봉사혼에도 중매인이 있어 신랑집과 신부집을 내왕하면서 노동의 조건과 기한을 약속한 다. 봉사기간 여자와의 접촉은 없으며, 약속한 기한이 끝나면 여자를 맞이하여 혼례식을 올리고 부부가 된다. 봉사혼은 빈곤한 하층계급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론되고 있다.

봉사혼에는 혼인 전 봉사, 혼인 후 봉사, 그리고 혼인 전후 계속 봉사하는 형이 있었다. 봉사혼의 일종이면서 솔서혼과도 유사한 혼인이 평안남도 화전민 사이에 행하여졌는데, 그 곳에서는 집안에 아들이 있는 경우에도 딸이 혼인하면 사위가 일정기간 처가에서 생활한다. 그 기간이 짧게는 5, 6년, 길게는 10여 년이 되며, 처가의 경제적 사정에 따라 분가 혹은 독립하는 시기가 결정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일생을 처가에서 살기도 한다.

혼전(婚前)봉사혼과 혼후(婚後)봉사혼을 구별하지 않는 사례 또한 평안남도 화전민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이 경우는 딸이 10세 전후한 어린 나이에 17세 전후의 장래 사위를 맞이하여 노력봉사를 하도록 하고 딸이 성인이 된 뒤에 혼인을 시킨다. 혼인한 뒤에도 계속 처가살이를 하며 적절한 시기가 지난 뒤에야 분가할 수 있다.

솔서혼

솔서혼(率壻婚)이란 아들이 없고 딸만 있는 사람이 사위를 맞이하여 동거하는 데릴사위제도를 말한다. 거주규정상 부처제(婦處制)를 특색으로 하는 솔서혼은 혼례식을 올린 뒤에도 신부집에 거주할 것과 그 기간이 일정하지 않다는 점에서 봉사혼과 구별된다.

재산상속문서인 분재기(分財記)나 외손봉사(外孫奉祀) 관행이 자주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조선 초기 및 중기까지도 솔서혼이 빈번히 행해진 것으로 추론된다. 외손봉사는 아들이 없고 딸만 있는 사람이 사위와 동거하고 본인이 죽은 뒤 제사를 외손이 담당하도록 하는 관행이다.

후대로 오면서 외손봉사가 적어지고 딸만 있는 집에서는 딸을 출가시키고 가까운 친족으로부터 양자를 받아들여 제사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출가한 여인이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고 솔서혼으로 들어온 사위가 장인의 성을 따르지 않기에, 성(姓)의 계승을 위해서는 양자를 필요로 하였다.

‘넘어다보는 단지에 보리 석 되만 있으면 처가살이하지 않는다.’ 했던 속담에서 알 수 있듯이, 처가살이에는 정신적 고통이 따랐기에 데릴사위는 지체가 낮은 사람이 해왔다.

교환혼

교환혼(交換婚)에는 두 종류가 있어, 갑이 을에게 딸을 주면, 을은 병에게, 병은 갑에게 딸을 주는 ‘물레혼인’·‘옷혼인’ 또는 ‘물레바꿈’이 있고, 두 사람이 딸을 직접 주고받는 ‘누이바꿈’이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물레바꿈은 극히 드문 반면 누이바꿈은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교환혼이 행해졌던 이유로는 집안 간 우의를 돈독히 하려는 목적도 있겠으나, 하층계급을 중심으로 혼비를 절약하고자 하는 경제적 이유가 보다 중요하게 작용하였던 것으로 추론된다.

배우자 수에 따른 혼인 유형

배우자 수의 조합에 따라서는 일부일처제, 일부다처제, 다부일처제 그리고 집단혼으로 나뉜다. 미국의 인류학자 조지 머독(George Murdock)에 따르면 554개 부족사회를 연구한 결과 일부다처제가 415개, 일부일처제가 135개 그리고 다부일처제가 4개로 나타났다. 다만 규범적으로는 일부다처제의 빈도가 가장 높으나 현실에서는 일부일처제가 다수를 이루는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나라의 전통적 혼인형태는 일부일처제를 원칙으로 하되 일부다처제를 묵인하는 특징을 보인다. 일부다처제를 묵인하는 정도와 내용은 시대와 계층에 따라 차이가 있다. 곧 가부장제 가족제도가 출현하고 사유재산제가 발전함에 따라, 신라 왕실 및 귀족계급 사이에서는 일부다처제와 첩제(妾制)가 성행하였음을 여러 기록에서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왕후귀족은 물론 일반 권문세가에서도 다처(多妻) 및 축첩(蓄妾) 습속이 성행하였다.『고려도경』잡속조(雜俗條)에 의하면, “고려 조정에 잉첩(媵妾: 귀인의 시중을 드는 첩)이 있고 관료에게 첩이 있으니, 이들은 서민의 처나 잡역에 종사하는 비(婢)의 복식과 비슷한 것을 입었다. 부잣집에서는 3∼4인의 처를 취하였는데 이들은 자녀를 출산하면 별실(別室)에서 산다”고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다처제와 축첩제가 병존하였으며, 서처(庶妻)를 적처(嫡妻)와 다름없는 신분으로 인정하여 첩과 구분하는 경향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종전과 같은 다처제 형태는 점차 사라지고 첩제가 제도화되었다. 중국식 예교의 도입에 따라 적서의 구분을 명확히 하기 위해 두 명의 적처를 동시에 둘 수 없음을 명시함으로써, 서처도 첩의 신분으로 전락시켰다. 1413년(태종 13)에는 중혼금지 법령이 제정되었는데, 이후에도 종전의 다처제는 존속했던 것으로 보이며 중종 이후에야 완전히 소멸되었다.

첩제의 확립과 더불어 적서의 차별은 더욱 강화되었다.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이 제정되어 서자는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는 등 신분·출세·재산상속 등에 심한 제약을 받았다. 제례(祭禮)에 있어서도 정처가 사망한 뒤 개취하면 후처도 선처와 마찬가지로 적처이므로, 선후 두 처만 사당에 모시고 첩은 서자가 별실에서 제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천첩(賤妾)은 물론 양첩(良妾)이라 할지라도 남편을 부군(夫君), 적처를 여군(女君)이라 칭하였으며, 적자에 대해서는 노비가 상전의 자제를 대할 때 쓰는 서방님·도련님 호칭을 사용하였다. 적서의 엄격한 차별은 축첩을 억제하는 면이 있었으나, 예(禮)·법(法)에서 첩제를 공인한 것은 가계계승의 목적에 기인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실제로는 탐색(貪色)과 방종 때문에 축첩이 성행하였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축첩은 상류계층에서 보다 성행하였지만 일반서민들에게까지도 퍼져, 처와 첩간의 반목질시와 그들 후손간의 잦은 분쟁 등으로 사회적 차원의 문제를 야기하였다. 현재 우리나라는 법률상 일부일처제를 취하고 있고, 현실에서는 일부다처제적 부부가 존재하기도 한다.

거주 규정에 따른 혼인 유형

혼인한 부부가 거처를 어디에 정하느냐에 따라, 남편 집에 거주하는 것을 부처제거주(父處制居住), 부인 집에 거주하는 것을 모처제거주(母處制居住)라 한다. 부처제·모처제는 재산 상속, 가계 계승 등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으로 부처제거주는 부계가족과, 모처제거주는 모계가족과 연계된다. 이 밖에 부부가 새로운 거주제를 선택하는 신처제(新處制)가 있으며, 이들을 조합한 모처제-신처제, 모처제-부처제(父處制) 등도 있다.

서옥제

『삼국지』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고구려에서는 혼인이 결정된 뒤 신부의 친정집 뒤에 작은 집을 지어 서옥(婿屋)이라 부르며, 저녁에 사위가 부인집에 와 문 밖에서 자기의 이름을 알리고 무릎 꿇고 절하면서 부인과 동숙할 것을 세 번 원하면 여자의 부모는 이것을 듣고 소옥(小屋)에서 동숙하기를 허가하였다고 한다. 남편은 다음날 떠날 때 전백(錢帛)을 놓고 갔으며, 부인은 자녀를 낳고 자녀가 성장한 뒤에야 비로소 남편 집에 살러 갔다고 한다.

이러한 혼인관행을 두고 일부 학자들은 데릴사위제도 즉, 솔서제라 보았으며 이를 토대로 고대사회가 모계사회였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나 혼인한 여자가 친정에 머물러 있고 신랑이 내왕을 하면서 잠을 자고 갔으며, 자녀를 낳고 성장한 뒤에는 남편 집으로 살러 가는 것이었기에 이를 데릴사위제도라 보기보다는 모처-부처제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한편 『삼국지』위서 동이전의 기록을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전환하는 과도기적 시기의 혼인형태로 설명하는 견해도 있다. 이 해석은 모든 사회가 모계사회로부터 부계사회로 발전한다는 진화론적 가설을 전제로, 모처-부처제의 이중적 성격을 과도기적인 것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적 관점의 해석보다는 우리 고유의 친족제도로부터 유래되는 정형적 거주규정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친영

우리나라 혼인제도의 정형이라 할 모처-부처제 혼인관행은 조선시대 들어와 문제시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중국으로부터『가례』를 받아들여 관혼상제 등 4례(禮)를 정비하고 모든 의례와 절차를 주자의『가례』에 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례』의 혼인조에는 친영(親迎)이라는 조목이 있다. 이는 혼례 중 가장 중요한 대목으로,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기 위하여 신랑집에서 행하는 혼례에 관한 것이다.『가례』에 따르면 혼례식은 신랑집에서 행하게 되어 있어, 신부집에서 혼례식을 행해온 우리의 고유한 전통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우리 고유의 혼속에 대하여 처음 비판을 제기한 사람은 정도전(鄭道傳)이었고, 태종도 “우리나라의 의관문물(衣冠文物)이 모두 중국의 제도를 따르고 있는데, 홀로 혼례만이 구습(舊習)대로여서 중국인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있으므로 고금의 제도를 참작하여 혼례를 정하라”고 명하였다. 1435년(세종 17) 예조에서는 왕실과 양반 그리고 서민이 준수하여야 할 혼례의(婚禮儀)를 세밀히 작성하였다.

이후 왕실에서는 새로운 혼례를 솔선수범하기 위해 파원군 윤평(坡原君 尹泙)과 숙순옹주(淑順翁主)의 혼례와 계양군 증(桂陽君 璔)과 중추원사 한확(韓確)의 딸의 혼례를 친영의 예에 따라 거행하였다. 그러나 친영의 예는 사대부 사이에서 조차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여, 중종 때에 이르러 신진사대부들을 중심으로 친영이 혼인의 정례(正禮)이기에 이를 법률로 정하여 강력히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중종도 문정왕후(文定王后)를 맞이할 때 친영을 행함으로써 왕실과 사대부들 사이에 친영을 보급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개혁을 주장하던 신진사대부들이 조광조(趙光祖) 등의 사화로 몰락함에 따라 그들의 주장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다가, 명종 때에 이르러 다시 친영의 문제가 거론되었다. 1549년(명조 4) 예조판서 윤개(尹漑)는 “혼인에 사치가 성행하며 혼인 같은 중대사를 풍약(豐約)에 따르고 인정에 치우쳐 예가 바르지 못하고 혼례에 남녀가 유규(幽閨)중에 비밀히 만나 3일째야 서로 보게 되는 사사로운 감정이 앞서고 예의가 뒤를 따르니 이것은 예가 아니다. 따라서『오례의(五禮儀)』에 따라 귀천상하 없이 친영지례를 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1554년 사헌부는 오히려 친영을 반대하여,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처해 있는 것을 보더라도 중국과 토지가 벌써 다르고 풍기(風氣)가 같지 않으며, 삼강오륜이라 할지라도 다르지 않을 수 없다. 문물제도라 할지라도 부득불 중국과 다름이 있다.……부귀부가(婦歸夫家)가 순리이지만 우리나라는 부귀부가(夫歸婦家)하고……, 3년간 거처한 연후에 친영을 행함이 가하니 어찌 거처를 폐지할 것이냐?”고 반박하였다.

이러한 논란을 거친 끝에 일부 사대부를 중심으로 전통적 남귀여가(男歸女家)의 혼속과 중국식 친영의 예를 합한 절충론이 제시되었다. 이는 일명 반친영(半親迎)으로서 신랑이 신부집에서 대례(大禮)를 행하되 오래 머무르지 않고 사흘째 신랑집에서 구고지례(舅姑之禮: 폐백)를 행하는 것으로 삼일우귀(三日于歸)라고도 한다. 반친영은 일부 사대부를 중심으로 16세기 이후 행해지기 시작하였으며,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보급된 것은 18세기경으로 추측된다.

삼일우귀

삼일우귀의 혼례과정을 보면, 신랑일행이 혼례식을 올리기 위해 신부집으로 가는 초행(醮行), 신부집에서 행하는 전안지례(尊雁之禮:신랑이 신부집에 나무기러기를 가지고 가서 상 위에 놓고 절하는 예)·교배지례(交拜之禮)·합근지례(合卺之禮), 그리고 신방을 치루고 사흘째 신부를 데리고 신행을 하는 구고지례로 구성된다.

반친영 양식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혼인 형태이나, 지방에 따라서는 극히 최근까지도 ‘해묵이’ 또는 ‘달묵이’라는 습속이 있었다. 이는 반친영 이전의 혼속으로 신랑이 신부집에서 대례를 올린 뒤 신랑만 귀가한 후 이른바 재행(再行)을 한다. 신부는 자기 집에서 해를 넘기거나 달을 넘긴 뒤 다시 날을 정하여 시가(媤家)에 가는 신행을 한다.

해묵이와 달묵이 관행이 사라진 것은 구식혼인이 없어진 것과 거의 때를 같이한다. 삼일우귀로 인해 생겨난 것 중 하나가 인재행(引再行)이다. 초행과 신행 사이에 재행을 하는 것이 우리 혼속의 특성이었으나, 삼일우귀를 하면 재행할 시간이 없고, 특히 신랑집과 신부집이 멀 경우 재행하기가 불가능했다. 이에 첫날은 신부집에서 지내고 다음날 저녁은 인근 마을에서 잔 뒤 다시 신부집으로 가는 인재행이 등장했다.

현대 한국의 혼인 문화

서구식 혼인제도의 유입

우리나라에서 전통적 혼인제도가 약화되고 서구식 근대화된 혼인제도가 유입되기 시작한 과정에 대해서는 자료가 극히 희소하다. “연애”란 말이 일반화된 것은 1910년대 말 이후로,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일본과 중국의 중개를 거쳐 이루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19세기 초 중국에 와 있던 서양 선교사들이 “러브(love)”의 번역어로 연애를 택한 일이 몇 차례 있었다 한다.

연애라는 말은 남녀 사이의 사랑에만 적용되는 개념으로 식민지 시대 지식인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어갔다. 이 과정에서 조혼한 조강지처를 버리고 신여성과 연애를 하는 유학생들의 이야기나, 사랑에 목숨을 걸고 과감히 “정사(情死)”한 이야기들이 1920년대 30년대를 식민지 시대를 풍미했다.

우리나라에 서구식 혼인의례가 도입된 건 기독교의 전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혼인식은 1890년 정동 교회에서 교회 신도인 박신실과 강신성의 혼인식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혼인식을 주관한 선교사들은 사람들의 항의를 두려워한 나머지 형식은 신식을 따랐지만 혼례복만은 구식 예복을 입게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892년 이화학당 학생이었던 황 씨와 배재학당 남학생의 혼인식에서 신부는 흰색 치마저고리에 면사포를 착용했고 신랑은 프록코트를 입고 예모를 썼다. 1910년대 혼례복을 보면 신부는 흰색 치마저고리에 화관과 쓰개치마형 베일을 썼으며 신랑은 당시 모닝코트라 불렸던 턱시도 칼라의 연미복을 입고 칼라를 꺾어 내린 흰색 와이셔츠에 보타이 차림이었다. 1920년대에는 신여성의 등장으로 신부의 치마 길이가 짧아졌다. 흰색 저고리에 흰색 양말과 흰 구두를 신었으며 이마를 덮는 화관에 쓰개치마형 베일을 썼다. 1920년 4월 8일 일본에서 거행된 조선 왕조의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의 혼인식을 보면 완전히 서구적 스타일이다. 볼레로 스타일의 짧은 팔 드레스에 긴 장갑을 끼고 타조 깃을 장식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금관을 썼으며 긴 베일을 머리 뒤에서 늘어뜨렸다. 드레스 자락은 길고 폭이 넓으며 뒷자락에 트레인이 길게 늘어지는 형태로 서구식과 한식이 교차되는 모습이다. 1930년대에는 서양식 웨딩드레스가 등장하였으며 베일, 들러리와 화동도 출현한 때이다. 이후 서구식 낭만적 혼인 개념의 유입은 미군정기 동안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되나, 6.25전쟁과 분단, 이후의 빈곤과 극심한 사회혼란을 거치는 동안 사회적 수면 아래 침잠하다가, 생활수준이 높아지고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된 197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평균 초혼 연령

우리나라와 같이 “혼인 적령기”를 지나면 혼인율이 90% 이상을 넘어서는 경우를 보편혼 사회라 한다. 다만 실제 초혼 연령이나 혼인 비율, 혼인 풍습이나 혼인 의미 등은 문화권별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고, 동일 사회 안에서도 역사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에 비추어볼 때 혼인 적령기의 존재 여부는 그 근거가 빈약하다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평균 초혼연령을 보면 1920년대에는 남자 21세 여자 18세였다가 1955년에는 남자 24.5세 여자 20.4세이던 것이 1995년에는 남자 28.6세, 여자 25.5세로 높아졌다. 2010년에는 남자 31.4 여자 29.2세로 세계적 수준에서도 만혼(晩婚) 경향을 보이고 있다.

혼인방식: 중매혼으로부터 연애혼으로

근대 이전 시대의 혼인은 친족간 결합이었음을 사회사가들은 일관성있게 보여주고 있다. 곧 전산업사회에서 배우자 범위는 사회적 신분, 가문, 재산 등의 일정한 기준에 의해 미리 제한되어 있었고, 통혼은 친족과 지역 공동체의 연계망에 의해 조정되었다. 혼인은 가문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거나 경제적 번영 및 안정을 도모하는데 일차적 목적이 있었기에, 노동력을 생산하고 적법한 상속자를 출산하는데 혼인의 가장 큰 의미가 있었다.

현대사회로 들어서면서는 배우자 선택 시 부모나 친족 집단의 영향력 대신 혼인 당사자의 권리가 상당히 강화되었음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배우자 선택이 사랑이나 매력 같이 순수하게 개인적 요인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낭만적 사랑 또한 은밀하게 사회적 규칙과 결합되어 나타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배우자 선택 유형은 중매혼, 연애혼, 절충혼으로 분류하나 이 분류에는 다소 모호한 면이 있다. 통념상으로는 혼인을 전제로 만남이 이루어지면 중매혼, 일정 기간 사귐을 지속한 이후 “특별한 감정을 느껴” 혼인에 이르게 되면 연애혼이라 규정하나 이를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는 “연애 반 중매 반”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분명한 건 전반적으로 중매혼의 비율은 감소하는 대신 연애혼의 비율은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1981년∼1989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중매혼은 58.4%에서 39.4%로 감소한 대신 연애혼은 36.3%에서 54.7%로 증가하였음을 볼 수 있다.

한편 만남의 계기를 통해 혼인 유형을 분류해보면 친척 부모 형제 자매 등 가족 네트워크를 통해 혼인에 이른 경우가 35.4%, 친구 직장 동료, 학교 선후배 등 개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한 경우가 41.9%로 나타났고, 전문 중매인이나 결혼정보회사 등을 이용한 중매혼은 2.3%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동안 배우자 선택 조건으로 중시되던 대표적 조건들을 보면, 1950년대는 학력, 성격 가문이 1970년대는 성격 건강 가문이 1980년대는 건강 성격 장래성 직업이 그리고 1990년대는 부모 세대의 경우 건강과 성격을 자녀 세대의 경우 성격과 애정 그리고 장래성을 지적한 바 있다.

혼인 과정에서 배우자 선택 조건을 관찰해 보면, 혼인은 여전히 집안과 집안의 만남을 의미하는 전통적 요소와 혼인 당사자들의 낭만적 사랑이나 개인적 자질을 고려하는 현대적 요소가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전반적으로는 가족적 요소가 강조되던 것으로부터 개인적 요소가 중시되는 방향으로 변화되고 있음이 관찰된다.

배우자 결정 방식 중 누가 최종 결정권을 갖느냐를 놓고서는 현격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부모의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고 혼인 당사자의 선택권이 강화되어 가는 가운데, 어느 일방의 전격적 결정보다는 당사자와 부모의 의사를 동시에 중시하는 절충형 비율이 높은 특성을 보이고 있다.

곧 1950년대 조사에서는 배우자 결정 시 ‘전적으로 부모님의 의사에 따른다’는 비율이 11.5%로 나타났으나, 1980년대 이후 2000년대 조사에서는 그 비율이 1.6%∼0%로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부모님이 정한 후 당사자가 동의한다’는 1950년대 35.9% 수준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도 43.6%로 비교적 높은 비율을 보였으나, 2000년대에는 4.2%로 현저히 낮아지고 있다. 반면 ‘당사자가 정한 후 부모님이 승낙한다’는 방식은 1970년대 이후부터 가장 선호하는 배우자 선택 방식으로 부상했다.

혼인의 다양성증가: 국제결혼, 독신자, 무자녀의 증가

2000년「인구주택 총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12,958,108가구 중 부부와 미혼자녀로 구성된 2세대 가구가 50.4%로 반수를 가까스로 넘기고 있는 가운데, 1인 가구가 12.7%, 1세대 부부가구가 10.8%로 뒤를 잇고 있다. 이어 편모와 자녀로 구성된 가구가 6.1%, 부부와 자녀 그리고 편부모로 구성된 3세대가 5.5%를 차지하고 있다. 이 이외에도 비혈연가구 1.4%, 편부와 자녀로 구성된 가구 1.3%, 부부와 자녀 그리고 양친이 함께 사는 3세대 가구 1.3%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들어 대안가족을 위시하여 가족의 다양성에 대한 관심이 촉발된 계기는 이혼 및 재혼의 증가로 인한 다양한 복합가족의 등장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다양한 혼인양식을 유형화해보면, 첫째 맞벌이 부부가족이 증가하면서 나타나고 있는 정기적 격리부부로 만남의 간격에 따라 주말부부, 월말부부, 비정기적 부부 등이 있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 부부간 역할 분담 유형에 따라 완벽하게 역할을 공유하는 부부도 있고, 숫자는 적지만 남편이 전업주부 역할을 하고 부인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역할전이(轉移) 가족도 등장하고 있다. 이들 부부가 자신들의 커리어와 자녀양육의 부담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에 따라 “선택적 무자녀 가족” 또한 늘고 있는 추세이다.

둘째 이혼 및 재혼의 증가가 가져온 다양한 가족양식이 있다. 이혼의 증가는 자연스럽게 모자가족 혹은 부자가족과 같은 한 부모 가족의 증가를 가져오고 있고, 재혼의 증가는 초혼 및 재혼 커플, 재혼 및 재혼 커플의 다양한 조합을 통해 새로운 양식의 복합(複合)가족을 만들어내고 있다.

셋째 기존의 혼인 및 가족제도에 편입되지 않은 채 완전히 새로운 생활양식을 모색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는 혼인제도 자체로부터 자유로운 독신가구와 혼인의 법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동거를 들 수 있다.

독신가구의 증가는 비(非)가족원과의 동거가구 증가를 동시에 수반하고 있다. 이른바 “비가족 가구”로 불리우는 현상 또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부모로부터 독립해서 생활하는 젊은 세대의 증가, 혼인을 연기하는 젊은 층의 증가, 이혼 이후 독신을 고수하는 층의 증가, 노인 단독가구의 증가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편 최근 들어서는 한국사회 전반의 다문화 추세와 맞물리면서 국제결혼비율이 증가하고 있어 전체 혼인의 15%에 이른다(여성가족부, 2012). 국제결혼은 2002년 15,202건에서 2005년 42,356건으로 증가하다 2010년 34,235건으로 다소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다. 2010년 기준 한국인 남편과 외국인 아내의 결혼이 26,274건이고 한국인 아내와 외국인 남편이 7,961건이며, 상대방 배우자의 국적은 중국, 베트남, 필리핀 순이다.

혼인의 의미 변화와 혼인의 미래

사랑에 입각한 낭만적 혼인관이 확산되면서 혼전 성관계를 둘러싼 태도에도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현재 이중 성규범이 완전히 불식된 것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사이라면 혼전관계가 가능하다는 의식이 젊은 층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1980년대 조사에 따르면 여성들은 혼전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데 70∼80%의 높은 지지율을 보였으나, 1990년대 조사에서는 그 비율이 47∼24%로 감소하고 있다. 반면 사랑하거나 혼인할 사이라면 혼전관계를 허용하겠다는 비율이 1985∼1995년 기간 중 남자는 38.7%에서 72.9%로 여자는 19.8%에서 49.8%로 눈에 띄게 증가하였다. 서구에서도 혼전 성관계를 둘러싼 태도가 먼저 변화하고 뒤를 이어 행동의 변화를 수반하였듯이 우리나라도 현재 진행 중인 혼전 관계에 대한 규범 및 인식의 변화가 행동상의 변화를 촉발할 것으로 추론된다.

혼인의 의미는 향후 다양성과 불확실성이 동시에 증가할 것이며 “친밀한 환경”을 만들어가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의미가 강화되리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혼인의 다양성과 불확실성이 증가할 것이라는 의미는 이혼율 급증, 출산율 감소, 고령사회 진입 등의 인구학적 구조 변화와 더불어 다양한 혼인형태가 증가하리라는 것과, 개인의 생애주기에서 과거에는 당연시되어오던 것이 이제는 의식적인 선택영역으로 화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곧 혼인을 할 것인지 여부부터 혼인 시기, 출산 의지와 이상적 자녀수, 이혼의 가능성 등이 모두 개인적 선택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는 비관적 전망이 낙관적 전망보다 우세하여 개인적 자유와 자아실현이 혼인 및 자녀양육이나 부양, 돌봄보다 중요한 가치로 부상하게 되면서 가족은 점차 취약한 제도로 화하게 되리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과거에는 혼인관계가 소멸되는 원인 규명에 주력했으나, 앞으로는 관계가 지속되는 이유에 관심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 특히 혼인 및 친밀한 관계가 다른 인간관계와 구분되는 속성은 무엇인지, 혼인 및 친밀한 관계를 지속시키도록 하는 수수께끼는 무엇인지 풀기를 희망하고 있다. 친밀한 혼인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증가하면서, 친밀한 관계의 역설적 본질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이 증가하리라 예상된다.

가족법 개정의 내용

현재까지 총 6차에 걸쳐 진행된 가족법 개정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52년 신민법 제정 시 여성의 인권을 전혀 고려하지 않음에 착안하여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민법 중 친족 상속편 제정에 관한 건의”를 시작함으로서 60여년에 걸친 가족법 개정운동의 역사가 시작된다.

1957년 12월 제26회 정기국회에서 제정된 신민법(1960년 1월 1일부터 시행)의 주요 내용은 ‘처의 무능력 제도 폐지’, ‘부부 별산제 채택’, ‘재판상 이혼원인상의 부부평등’, ‘양자법의 대개혁’, ‘분가의 자유’, ‘호주권의 약화’, ‘모계혈통의 계승 인정’, ‘호주상속과 재산상속의 분리’, ‘재산상속 순위에 있어 여성의 지위 향상’, ‘혼인과 협의 이혼의 자유’ 등으로 되어 있다.

1962년 12월 29일 제1차 가족법 개정에서는 ‘법정 분가제도’를 신설하여 차남 이하는 혼인신고 이후 분가가 강제되기 시작했다.

1977년 12월 31일 제2차 가족법 개정에서는 ‘부모 동의없이 혼인할 수 있는 연령을 남녀 똑같이 20세로 통일’, ‘미성년자도 혼인하면 성년자의 지위 획득’, ‘소유가 분명치 않은 재산은 부부의 공동소유’, ‘협의이혼도 판사의 확인을 거쳐야 함’, ‘친권은 부모 공동으로 행사함’, ‘동일 호적에 있는 딸의 상속 몫이 아들과 같아짐’, ‘아내의 상속몫이 장남과 같아짐’, ‘유언상속에 제한’을 두도록 하였다. 같은 해 12월 17일에는「혼인에 관한 특례법」을 제정하여 1978년 12월 31일까지 한시적으로 동성동본간 혼인신고 및 자녀입적 신고를 받기도 하였다.

1990년 1월 13일 제3차 가족법 개정에서는 ‘호주의 권리 및 의무 조항 대폭 삭제’, ‘친족범위는 부모계 8촌까지로 조정’, ‘이혼 시 재산분할 청구권 신설’, ‘친권제도 개정’, ‘재산상속제도 개정’, ‘이혼부부의 자녀양육 규정 개정’, ‘적모서자 계모자 관계 개정’ 등이 이루어졌다.

2002년 1월 14일 제4차 가족법 개정에서는 ‘상속회복 청구권의 청구기간 확대’, ‘한정 승인 인정 범위 확대’가 이루어졌고, 2005년 3월 31일 제 5차 가족법 개정에서는 ‘호주제도 폐지’, ‘동성동본 금혼제도에서 근친혼 금지제도로 변경’, ‘여성에 대한 재혼기간 제도 폐지’, ‘이혼 시 자녀의 양육면접교섭에 대한 내용 확대’, ‘처도 친생부인의 소 제기 가능’, ‘친생부인의 소 종결 후 남편이 자녀에 대해 친생자임을 승인할 수 있었던 규정 삭제’, ‘15세 미만자의 입양승낙의 경우와 15세 미만자의 협의파양의 경우 가정법원의 허가를 받도록 함’, ‘친양자 제도 신설’, ‘친권행사에 대한 의무규정 신설’, ‘피상속인이 특별히 부양한 경우 기여분 인정’, ‘한정승인 후 피상속인의 채무가 상속재산을 초과한 경우, 상속인은 처분한 재산의 가액을 합하여 채무를 변제하여야 한다는 규정’이 신설되었다.

2007년 12월 21일 제6차 가족법 개정시에는 ‘남녀의 약혼연령 및 혼인연령 만 18세로 일치’, ‘이혼 숙려기간 도입’, ‘협의이혼 시 자녀의 양육사항 및 친권자 지정 합의 의무화’, ‘자녀의 면접 교섭권 인정’ ‘재산분할 청구권 보전을 위한 사해행위취소권 신설’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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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갑·관례·혼례」(민제,『한국민속대관』Ⅰ,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0)
「서류부가혼속의 변천과 그 성격」(박혜인,『민족문화연구』14, 1979)
「친족집단과 조상숭배」(이광규,『한국문화인류학』9, 1977)
「동족부락의 통혼권에 관한 연구」(여중철,『인류학논집』1, 1975)
「중국의례가 한국의례생활에 미친 영향」(장철수,『문화인류학』6, 1973)
「혼인의 친영에 대하여」(안병태,『한국민속학』5, 1972)
「우리나라 솔서혼속에 유래하는 친족과 금혼범위」(박병호,『서울대학교법학』4, 1962)
「농촌가족제도」(김주수,『법정』14, 1959)
「재혼금지습속의 유래에 대한 연구」(이상백,『한국문화사연구논고』, 을유문화사, 1947)
「조선의 조혼 및 그 기원에 대한 일고찰」(김두헌,『진단학보』2, 1935)
「朝鮮原始諸種族の婚姻 1·2」(張承斗,『朝鮮』281·282, 1939)
「朝鮮社會婚姻意識に就いて」(張承斗,『朝鮮』289, 1939)
「朝鮮古代社會に於ける拜天思想と婚姻制度淵源に關する考察」(張承斗,『朝鮮』279, 1938)
「朝鮮の結婚に關る慣習」(李能和,『朝鮮』169, 1929)
Social Structure (George P. Murdock, New York: Macmillan,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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