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명은 일제강점기 간호사로 근우회 지명 집행위원, 의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896년(고종 33)에 태어났다. 전남 목포 출신으로 1922년 서울에서 여자고학생상조회를 조직하여 불우 여성에 대한 교육을 전담하였다.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1925년에 조선여성동우회를 조직하여 운영하였다. 1927년 신간회가 조직되자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계 여성을 망라한 근우회를 결성하여 항일과 계몽운동을 주도하였다. 근우회의 의장, 중앙집행위원, 검사위원에 선임되어 사회주의계 여성을 대표하면서 여성운동에 투신하였다.
전라남도 목포 출신이다. 1922년 4월 1일 동지 김영준(金永俊) · 전유덕(田有德) · 유현숙(劉賢淑) · 이완구(李玩昫) 등 20여 명의 신여성과 함께 서울에서 여자고학생상조회(女子苦學生相助會)를 조직하였다. 이는 소외되고 가난해 학업을 계속할 수 없는 불우 여성에 대한 교육을 전담했다는 점에서 여성운동의 또다른 경향과 분야를 개척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운동은 민족주의적 기반 위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1924년 이후 사회주의적 여성운동과 연관되어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정종명도 처음에는 민족주의계의 영향을 받았으나 1920년대 중반 전후 사회주의계로 전환해 갔다. 1925년 5월에 동지 박원희(朴元熙) · 김필애(金弼愛) · 정칠성(丁七星) · 허정숙(許貞淑) · 주세죽(朱世竹) · 오수덕(吳壽德) 등 20여 명과 함께 사회주의 사상을 배경으로 한 최초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를 서울에서 조직,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뒷날 근우회(槿友會)를 조직하여 항일과 계몽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이 단체는 여성해방과 단결을 강령으로 채택하고 있다.
정종명은 1926년 12월에 조직된 망월구락부(望月俱樂部)에도 참여하였다.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자 별동자매대와 같은 성격으로 5월 27일 서울에서 좌우합작과 민족유일당운동의 일환으로 근우회가 조직되었다. 동지 김활란(金活蘭) · 황신덕(黃信德) · 최은희(崔恩喜) 등 50여 명의 민족 · 사회주의계 여성을 망라해 이 모임을 결성하였다. 정종명은 근우회의 지명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근우회를 이끌어 가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28년 5월 근우회창립1주년기념식을 거행하려 할 때 일제의 탄압이 있자 허정숙과 함께 교섭위원으로 집회 허가를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임시대회를 같은 해 7월 14일 서울 경운동 천도교 대교당에서 개최할 때 대회준비위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사회자로 이 모임을 이끌어 나갔다. 1929년에는 동 임시집행부 선거에서 의장으로 선임되어 부의장으로 뽑힌 김순희(金順姬)와 함께 근우회를 운영해 갔다. 1927 · 1928년에 동 중앙집행위원, 1930년에는 정칠성 등 5명과 함께 검사위원(檢査委員)에 선임되었다. 1929년 12월 20일 광주학생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근우회의 허정숙 · 유덕희(劉德姬) · 박차정(朴次貞) · 박호진(朴昊辰) 등과 같이 붙잡혔다.
이보다 앞선 1927년 8월 27일 근우회 전주지회에서 ‘조선 여자의 지위향상과 단결’이라는 제목으로 동지회창립축하기념강연을 행한 바 있다. 또 이듬 해 2월 동 경성지회(京城支會)를 설치할 때는 심은숙(沈恩淑) · 권봉주(權鳳珠) · 김필수(金必壽) · 강석자(姜石子) · 김영희(金瑛禧) 등 7명과 함께 서무부위원으로도 활약하였다. 이처럼 정종명은 1931년 근우회가 해소될 때까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사회주의계 여성을 대표하면서 여성운동에 투신하였다.
2018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