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죽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조선여성동우회와 근우회를 주도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여성해방운동가, 독립운동가.
이칭
이명
까레에바, 한베라, 한세죽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899년 6월 7일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함경남도 함흥
주요 작품
나는 단발을 주장합니다|제일 미운 일 제일 보기 싫은 일-남자의 자기만 사람인 척하는 것
주요 경력
근우회 임시집행부|조선여성동우회 집행위원|경성여자청년동맹 집행위원
대표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2007)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주세죽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가, 여성해방운동가, 독립운동가이다. 중국 상하이에서 유학 중 사회주의 이론을 학습하였고, 귀국 후 사회주의 여성운동 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와 근우회를 주도하였다. 소련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공부하였으나, 소련에서 카자흐스탄 유배형을 받는 등 고난을 겪었다.

정의
일제강점기 조선여성동우회와 근우회를 주도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여성해방운동가, 독립운동가.
인적 사항

주세죽(朱世竹)은 1899년 6월 7일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함흥 영생여학교(永生女學校) 고등과에서 2년 동안 수학하였다. 1919년 함흥에서 3 · 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개월 동안 유치장에 감금되었으며, 공소가 끝나 석방되었다. 석방된 뒤 함흥의 한 병원에서 1921년까지 근무하였다.

1921년 4월 중국 상하이로 가서 안정씨여학교(晏鼎氏女學校)에 입학하여 영어와 피아노를 배웠다. 이때 허정숙(許貞淑)을 통해 고려공산당 청년조직 준비 모임에 가담하였다. 1922년 5월 귀국하였고, 같은 해 사회주의자 박헌영(朴憲永)과 결혼하였다.

주요 활동

1924년 5월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를 발기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13일 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 주최의 ‘연말대연설회’에 강연자로 나섰다. 1925년 1월 경성여자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해 개회 선언을 하고 강령과 규약을 기초하였으며,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5년 2월에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으로 선정되었고, 4월에는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 결성대회에서 중앙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5년 말 ‘제1차 조선공산당사건(신의주사건)’으로 임원근(林元根)유진희(兪鎭熙)‧박헌영 등과 체포되어 12월 2일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되었고, 같은 달 12일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1926년 6월부터 8월까지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 관련자로 다시 체포되었으나, 8월 20일경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기도 하였다.

1927년 4월 26일 여성단체인 근우회(槿友會) 발기총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같은 해 5월 27일 창립대회에 참가해 임시집행부 성원이 되었다. 1928년 8월 병보석으로 풀려난 박헌영과 함께 함경남도 석왕사(釋王寺)를 거쳐 고향인 함흥으로 가서 요양하던 중 11월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해 소련으로 탈출하였으며, 모스크바로 향하던 중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딸을 출산하였다. 같은 해 11월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박헌영과 함께 코민테른이 제공한 정치 망명가들을 위한 집에서 살았다.

1932년 1월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을 위해 박헌영과 중국 상하이로 갔다. 1933년 7월 박헌영이 체포되어 경성으로 압송된 뒤, 1934년 1월 24일 김단야(金丹冶)와 함께 소련 모스크바로 되돌아가서 같은 해 김단야와 재혼하였다. 1934년에 5개월가량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공부하였고, 그 뒤 외국인노동자출판부에서 교정원이 되었다.

1937년 11월 5일 재혼한 남편 김단야가 ‘일제 밀정’이라는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당하고 소련 내부인민위원부에 체포되어 두 달간의 심문 후 1938년부터 5년간 카자흐스탄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모스크바에서 카자흐스탄 알마아타(지금의 알마티)로 유배되어 1938년 9월부터 1940년 9월까지 피혁공장 개찰원으로 근무하였다. 1940년 9월부터 1946년 3월까지 카르마크치 구역 협동조합에서 근무하였다. 1943년 5월 22일 형이 만료된 후에도 유배지에 잔류하였다.

1946년 7월부터 크질오르다주 공업기업소에 있는 봉제 작업장에서 직공으로 근무하였다. 1946년 조국으로 귀환시켜 주거나 17세 된 딸과 함께 있도록 모스크바로 가게 해줄 것을 소련 당국에 요청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50년대 중엽 사망하였고, 1989년 3월 소련에서 명예가 회복되었다.

학문과 저술 · 사상과 작품

1921년 중국 유학 시절부터 청년사회주의자그룹과 교유하면서 사회주의 이론을 학습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성해방 의식이 투철하여 관련한 강연의 강연자와 대중지에서 사상가로서 활동하였다. 1924년 5월 ‘사회진화법칙에 표준 삼은 새 사회의 건설과 여성해방운동’을 목표에 둔 조선여성동우회에서 간부로 활동하면서 같은 해 12월 13일 신흥청년동맹 주최의 ‘연말대연설회’에서 ‘여성과 반역’이라는 주제로 강연자로 나섰다.

1925년 3월 8일 국제무산부인기념 대강연회에서는 '부인 해방의 원동력’이란 제목으로 강연하였고, 같은 해 8월 21일에는 여성해방의 상징이자 종래 낡은 제도의 구속을 타파하는 의미에서 조선여성동우회 간부인 허정숙‧ 김조이(金祚伊)와 함께 ‘단발(斷髮)’을 감행하였다. 같은 달 잡지 『 신여성』 제3권 8호에 「나는 단발을 주장합니다」를 발표하는 등 여성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강연이나 글들을 발표하는 등 여성해방운동론자로서 면모를 드러냈다.

1927년 4월 26일 ‘조선 여성의 공고한 단결과 지위 향상을 도모한다’라는 강령을 내건 근우회를 발기하고, 같은 해 10월 잡지 『 별건곤』 9호에는 「제일 미운 일 제일 보기 싫은 일-남자의 자기만 사람인 척하는 것」이라는 글을 투고하기도 하였다. 1929년부터 1931년까지, 그리고 1934년에 소련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해 사회주의 이론 및 여성해방운동에 관해 연구한 것으로 보인다.

상훈과 추모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강만길·성대경 편,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6)
한국역사연구회 근현대청년운동사연구반, 『한국근현대청년운동사』(풀빛, 1995)
고준석,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도서출판 글, 1992)
한국근현대사연구회 1930년대반, 『일제말 조선사회와 민족해방운동』(일송정, 1991)
한국역사연구회 1930년대연구반,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사』(한길사, 1991)
김준엽·김창순, 『박헌영』(인간사, 1988)
서대숙, 『한국공산주의 운동사연구』(화다, 1985)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4(고려대학교아세아문제연구소, 1973)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原書房, 1967)
이석태 편, 『사회과학대사전』(문우인서관, 1948)
『現代史資料』29(姜德相 · 梶村秀樹 編, みすず書房, 1972)

논문

원경, 「혁명과 박헌영과 나」(『역사비평』 37호, 역사비평사, 1997)
최규진, 「코민테른 6차 대회와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정치사상연구」(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6)

신문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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