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조선청년총동맹 등이 결성되어 사회주의 운동이 최고조기에 접어들었다. 이때 좌파여성동맹인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의 지도적 인물이며 반서울청년회파에 속하는 박정덕(朴貞德)·허정숙(許貞琡)·조보희(趙寶嬉) 등 16명이 중심이 되어 1925년 1월 18일 발기회를 열고, 같은 달 21일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강령은, ① 무산계급 여자청년의 투쟁적 교양과 조직적 훈련을 기함 ② 무산계급 여자청년의 단결력과 상부상조의 조직력으로 여성의 해방을 기하고, 당면의 이익을 위하여 투쟁함 등이었다. 그런데 강령 제2항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임석 경관에게 압수되었다.
규약에 의하면, 맹원이 될 자격은 만16세 이상 만 26세 이하의 여성으로 제한하고, 일반 청년 여성에게 해방적 의식을 각성하게 하는 수양 기관의 설치와, 출판·강연·강습·연구회 등을 자주 개최하는 등의 사업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이전에 조선여성동우회가 조직되었다. 동우회는 연령에 제한을 두지 않고 ‘사회진화법칙에 의한 신사회의 건설과, 여성해방운동에 앞장선 일꾼의 양성과 훈련 및 여성단결’을 강령으로 되어 있어, 경성여자청년동맹이 좀 더 극렬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정면으로 계급투쟁의 혁명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것으로,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조선청년총동맹 등의 결성으로 급격히 좌경화된 사회운동이 반영된 것이다.
그런데 경성여자청년동맹은 사실상 조봉암(曺奉岩)·박헌영(朴憲永)·임원근(林元根)이 중심이 된 조선청년총동맹의 반서울청년회파의 여자공산당 청년 조직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들의 부부관계에서 나타나며, 또 동지적 관계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따라서, 동맹은 원래 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 계열에 속한다. 그런데 조봉암·박헌영·임원근 등은 조선여성동우회를 통해 무의식 군중을 대상으로 대중 조직화 하려고 하였고, 경성여자청년동맹은 대중 조직을 발동시키는 핵심체로 만들고자 하였다.
이때 서울청년회파의 후원으로 박원희(朴元熙)·김숙정(金淑貞) 등이 경성여자청년회(京城女子靑年會)를 조직, 이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양자의 주동 인물이 모두 여성동우회 간부들이고, 명칭에 있어서도 ‘동맹’과 ‘회’의 차이 뿐이어서, 외견상으로는 별다른 단체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내용을 들려다 보면, 반서울청년회와 서울청년회의 대립이었으며, 여성동우회의 파쟁이 표면으로 나타난 결과이며, 여성운동의 주도권을 둘러싼 두 단체 간의 심한 갈등상태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926년 동경여자유학생 출신이며 일월회파(一月會派) 안광천(安光泉)의 처인 이현경(李賢卿)이 귀국하였다. 그리고 일월회파의 행동에 상응하여 황신덕(黃信德) 등과 조선여성운동의 통일을 위해 노력한 결과, 같은 해 12월 두 단체의 합동을 성취하여 중앙여자청년회(中央女子靑年會)를 발족시키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7년 신간회의 창립과 간부의 지도로 이현경 등이 발상하고 기획하여, 같은 해 4월 이후 전 여자유학생들을 망라하여 여성 단일단체를 형성하는 일을 추진하여, 근우회(槿友會)의 조직을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