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용풍(容豊). 경기도 개성 출신이다.
1914년 서울 미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했다. 1917년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를 거쳐 게이오오의숙[慶應義塾]에서 공부했다. 일본에 유학을 하는 동안에 사회주의사상을 수용했다.
1920년 봄 유학을 포기하고 귀국했다. 1920년 10월 상해로 건너가 혜령(惠靈)전문학교에 입학했다. 1921년 3월 고려공산청년단 상해회 결성에 참가하고 중앙위원이 되었다. 이 무렵 고려공산당(이르꾸쯔끄파) 상해지부에 입당했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상해에 있는 대한독립신문사 대표자격으로 참가했으며 이어 열린 극동청년대회에 고려공산청년단 대표자격으로 참가했다. 1922년 3월 국제공산청년동맹의 지도 아래 박헌영(朴憲永)·김단야(金丹野)와 함께 고려공산청년회 제2차 중앙총국을 결성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2년 4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을 국내로 이동하기 위해 박헌영, 김단야와 함께 귀국하다가 압록강변의 안동(安東)에서 검거되었다. 1922년 5월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1924년 1월 출옥한 후 서울에서 신흥청년동맹, 화요회 등에 가입했다. 1924년 5월 『동아일보』 기자가 되었으나 같은 해 7월 동맹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해고되었다. 1924년 8월 신흥청년동맹의 기관지를 발행할 목적으로 신흥청년사(新興靑年社)를 창립하고 상무위원이 되었다. 1924년 여름 허헌(許憲)의 딸 허정숙(許貞淑)과 결혼했다.
1925년 2월 화요파 공산주의그룹이 주도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이 되었다. 1925년 4월 고려공산청년회 창립대회에 참석하고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선전교양부를 담당했다.
1925년 8월 『조선일보』 기자가 되었으나 사회주의자를 해고하라는 조선총독부의 강압에 의해 같은 해 10월 16명의 기자와 함께 해직되었다. 1925년 11월 조선공산당 1차 검거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았다.
1931년 2월 잡지 『신천지(新天地)』에 신간회의 해소를 반대하는 「해소운운은 인식착오」를 발표했다. 1932년 8월 허정숙과 이혼했으며 이 무렵부터 사회주의운동의 일선에서 물러났다. 1933년 『조선중앙일보』에 입사해 1936년에는 지방부장이 되었다.
그 뒤 홍중(弘中)주식회사, 조선기계주식회사 등에 관여했다. 해방 후에는 1947년 민주주의독립전선 준비위원회 결성에 참가했다. 1963년 5월 서울에서 사망했다.
1993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