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은 서영(徐榮)·김순기(金舜基)·윤장섭(尹長燮)·윤성기(尹聖基)·윤영(尹榮)·김화(金華). 강원도 횡성 출신이다.
휘문고등보통학교 강습과를 중퇴하였다. 1926년 신흥청년동맹에서 활동하다 1927년 가을부터 만주 연길현(延吉縣)의 현립제39학교, 건원(建元)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28년 여름 길림(吉林)에서 길성(吉城)청년회 창립에 관여하였고, 1929년 1월에는 남만청년총동맹의 간부가 되었다. 1929년 가을 조선공산당 재건설준비위원회에 가입한 뒤, 10월에 고려공산청년회 재건설준비위원회 만주부를 조직하고 선전부 책임자가 되었다.
1931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같은 해 2월 중국공산당 동만특위 산하 조선국내공작위원회 공작원으로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임무를 띠고 입국하였다. 1931년 3월 서울에서 오성세(吳祘世)가 지도하던 공청 가두 야체이카를 인계받아 경성제대 야체이카로 개조하였다.
4월에는 다가오는 메이데이를 앞두고, 격문을 제작해 서울의 공장지대에 살포하였다. 5월 초에는 개성에서 개성 야체이카를 조직했고, 7월 서울로 돌아와 조선국내공작위원회와의 연락을 재개하였다. 8월에는 서울에서 국내공작위원회 야체이카를 결성하고 책임자가 되었으며, 같은 달 학생 부문 야체이카도 결성하였다.
그 해 9월「조선의 혁명적 노동조합과 혁명적 반대파의 조직과 임무」를 제작하였다.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전만주를 삼킨 제국주의전쟁과 혁명적 노동자, 농민의 임무」라는 반전 팸플릿을 살포하고 반제동맹 결성을 지도하였다.
10월에는 「조선의 혁명적 학생운동의 임무」라는 테제를 작성하였다. 11월 적색노동조합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적색투보(赤色鬪報)』를 제작한 뒤 경찰에 검거되어, 1934년 6월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수감중 옥중투쟁을 벌이다가 징역 8월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1939년 출옥한 뒤 곧 박헌영(朴憲永)이 이끌던 경성콤그룹에 가담, 1940년 12월 무렵 경성콤그룹 탄압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으나 병보석으로 출옥하였다.
1944년 11월경 이정윤(李廷允) 등과 공산주의자협의회를 조직하고 책임자로 활동, 영등포 일대에서 소규모 노동자서클을 지도하고, 국외 무장세력 및 소련과의 군사협력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김태준(金台俊)을 연안(延安)으로 파견하였다. 일제의 패망을 앞두고는 조선건국동맹과 통일전선결성 문제를 협의하였다.
1945년 3월 일본 경찰에 다시 검거되었다가 해방을 맞아 출옥한 직후, 조선공산당(장안파) 결성에 참여하였다. 9월에는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 및 선전부장 대리로 선출되었다. 이 무렵 조선공산당에 입당해 중앙위원회 조직국 위원이 되었다. 12월 독립동맹 환영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1946년 2월 조선공산당 중앙 및 지방동지 연석간담회에 중앙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해, 박헌영 중심의 당재건운동만을 당사의 정통으로 간주하는 견해를 비판하였다. 6월 조선공산당 서기국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8월에는 대회파의 한 사람으로서 「합당 문제에 대하여 당내 동지 제군에게 고함」을 발표하고 조선공산당으로부터 무기정권 처분을 받았다.
같은 해 11월 사회노동당 창립에 관여해 중앙위원이 되었고, 이후 「자기비판」을 성명하고 남조선노동당에 참여하였다. 1947년 1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상임위원이 되었다. 2월 이후에는 북조선노동당과 직접 연결되어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