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은 김동만, 박봉남(朴鳳男), 강철산(姜鐵山), 오만복. 함경북도 명천 출신이다.
1912년 북간도의 평강(平崗)보성촌(普成村)으로 이주하였다. 1916년길림성 연길현 수신향(守信鄕)오도구(五道溝) 공립학교에 입학하였다. 1920년 경신참변(庚申慘變)으로 이 학교가 폐쇄되자 화룡현이도구명암촌(明暗村)보진(普進)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21년 보진학교 고급반을 거쳐 1923년용정(龍井)의 동흥(東興)중학에 입학하였다. 동흥중학에 재학 중 평강 일대에서 청년회를 조직하는 활동을 전개했으며, 1927년 4월 무렵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7년 10월 제1차 간도공산당검거사건 당시 소련으로 피신하였다. 1928년 북간도에 돌아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화요파)을 재건하는 데 참여하였다.
1929년 봄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집행위원,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남만도(南滿道)위원회 책임비서가 된 이후 화요파의 만주 지역 최고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1929년 7월 길성(吉城)청년동맹 대회에서 일국일당 문제를 토론하였다. 1929년 9월 동경성(東京城)에서 정치이론강습반에 참가했으며, 12월에는 광주학생운동을 지지하는 용정시위투쟁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반일시위투쟁을 지도하였다.
1930년 6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30년 9월 중국공산당 영안현(寧安縣)임시위원회 선전부장이 되었다. 1931년 봄 중국공산당 목릉중심현위(穆陵中心縣委) 조직부장으로 신안촌(新安村)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32년 말 중국공산당 밀산현위(密山縣委) 서기가 되었다. 1933년 4월 밀산항일구국회 조직에 참여했으며, 1934년 4월에는 밀산항일유격대 결성을 주도하였다.
1934년 10월 밀산항일유격대를 동북항일연구 제4군 제2단으로 개편하고 제4군 당위원회 서기 겸 조직부장이 되었다. 1936년 3월 의란현(依蘭縣) 토룡산(土龍山) 최가둔(崔家屯)에서 지주의 자위단에게 습격당해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