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강석봉(姜錫峰), 호는 야정(野丁). 광주 출신. 역시 사회주의 운동가였던 강해석(姜海錫), 강영석(姜永錫), 강석원(姜錫元)의 형이다.
광주제일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광주공립농업학교를 중퇴하였다. 1914년 항일운동을 목적으로 조직된 삼합양조장구락부에 가입했으며, 1916년에는 대한인국민회 지부 활동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기도 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광주의 만세시위에서 격문인쇄에 필요한 용지를 제공하고, 시위에 직접 참여해 격문을 살포하였다. 이로 인해 징역 1년을 선고받고 1921년 출옥하였다. 이후 일본 주우오[中央]대학에서 사회주의사상을 공부하였다.
1923년 광주청년회와 광주 비아면소작인회에 가입했는데, 이 무렵 광주에서 사회주의 비밀결사인 신우회를 조직하였다. 1923년 9월 광주청년회 임시총회에서 임시의장으로 광주청년회의 혁신을 주도하였다. 1924년에는 목포무산청년회에 참여했고, 1925년에는 전남청년대회 준비위원, 사상단체 전남해방운동자동맹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5년 4월 서울파 공산주의 그룹이 주도한 전조선노농대회의 준비위원이 됨으로써 전국적인 활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1926년에는 전남청년연맹의 집행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조선공산당 제2차 당대회에 참석해 전남도당을 재건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1927년에는 조선청년총동맹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으며, 광주청년동맹과 신간회 광주지회의 간부로도 활동했다.
1928년 3월 조선공산당 중앙검사위원 후보가 되었으나 곧 조선공산당 4차 검거사건이 일어나자 경찰의 검거를 피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1934년 귀국한 뒤에는 사회주의운동에 관여하지 않고 목포에서 여객선 운항업, 해산물 수출업에 종사하였다.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 부위원장과 전남도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조선공산당 전남도당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러한 활동 때문에 미군정의 포고령 위반으로 2년 동안 투옥되기도 하였다. 1950년 7월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광주에서 광주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지만 곧 반동분자로 몰려 투옥되었다.
1960년 5월 사회대중당 전남도당 결성에 참여했고, 12월에는 사회당 창당에 참여해 중앙상임위원 겸 전남도당 부위원장이 되었다. 1961년 2월에는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