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은 춘추(春秋), 최광식(崔光植), 김옥산(金玉山). 함경북도 경성 출신이다.
고향에서 보통학교 및 함일(咸一)실업학교를 졸업했다. 일제의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해 함경북도 도청, 경성 군청에서 근무했다. 1919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함북연통제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동아일보』와 『신건설(新建設)』 경성지국을 운영했다. 1921년 10월 서울에서 김사국(金思國) 등에 의해 조직된 공산주의그룹의 함경북도오르그가 되었다. 이후 서울파 공산주의 그룹의 핵심적 인물로 활동했다.
1923년 3월 서울파가 주도한 전조선청년당대회에 경성청년회 대표로 참석했다. 1924년 4월 조선청년총동맹 창립대회에 참석해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24년 10월에는 서울파의 당 조직인 고려공산동맹에 가입해 함경북도 책임자가 되었다.
1925년 4월에는 서울파가 주도한 전조선노농대회 준비위원이 되었고, 이후 서울파의 사상단체 전진회(前進會)에도 가입했다. 1925년 12월 고려공산동맹의 코민테른 파견대표로 선임되어 모스크바에 가서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 가입문제에 관한 고려공산동맹의 입장을 전달했다.
1926년 봄 고려공산동맹의 교섭대표의 일원으로 조선공산당과 통일문제를 논의했다. 1927년 7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1927년 12월 조선공산당 제3차대회(이른바 춘경원당春景園黨)에 참석해 정치부원으로 선임되었다.
1928년 5월 일본경찰의 검거로 인해 파괴된 당중앙위원회를 이민용(李敏用), 방한민(方漢旻), 이준열(李駿烈)의 보선으로 재구성했다. 그 뒤 소련으로 피신했다.
1929년 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울상해파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방법에 대해 협의하는 과정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중앙기관의 위치문제를 둘러싸고 서울상해파의 다수파와 대립했다.
1929년 3월부터 독자적으로 조건공산당재조직준비위원회를 결성한 뒤 1930년 귀국했다. 그러나 자신이 주도한 공산주의그룹이 코민테른으로부터 종파로 규정된 것을 확인한 뒤 조선공산당재조직준비위원회를 해소하고 조선공산당재건설정리위원회로 재편했다.
「민족해방협동전선의 임무 및 조선 무산계급운동의 현단계」를 비롯해 당재건운동에 관한 여러 편의 글을 집필했다. 1930년 12월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1932년 9월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2009년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