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명은 송형호(宋亨浩), 호는 해도(解濤). 전라남도 완도 출신.
소안도(所安島)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한 뒤 완도의 사립 육영(育英)학교를 졸업했다. 1911년부터 1914년까지 서울의 사립 중앙학교에서 공부했다. 중앙학교 재학 중에는 전라도 출신 유학생단체인 재경완산(莞山)학우회를 결성했다.
1914년 중앙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소안도의 사립 중화(中和)학원과 완도군 노화도의 사립 영흥(永興)학교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인근 여러 지역에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3월 15일에 일어난 소안도의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했다.
1920년 11월에는 만주에서 결성된 무장투쟁단체인 대한독립단의 전라지단 조직책임자가 되었다. 이 때문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년 반 동안 감옥 생활을 한 뒤 1922년 가을에 출옥했다. 1922년 말에는 전국적 규모에 가까운 반일비밀결사단체 수의위친계(守義爲親契)의 결성을 주도했다. 수의위친계는 완도 · 광주 · 담양 · 구례 · 영광 · 무안 · 영암 · 나주 · 장성 · 목포 등 전라남도 지역 이외에도 전라북도와 경상도 일원까지 망라하는 조직이었다.
1923년에는 기존의 완도 배달청년회에 입회해 이 단체의 개혁을 주도했다. 1924년 3월에는 노동자 · 농민단체인 소안노농대성회(所安勞農大成會)를 조직했다. 소안노농대성회는 악질지주 배격, 미신타파 등을 표방했다. 소안노농대성회에서 임석경관을 배척한 사건으로 체포되어 다시 1년 이상을 감옥에서 보냈다.
1926년 6월에는 소안도에서 사상단체 살자회를 조직했다. 1926년 7월에는 서울파 공산주의그룹의 전진회(前進會)와 조선물산장려회 등이 결합한 민족통일전선기관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의 발기모임에서 사회를 맡았다. 같은 해 말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1927년 1월에는 소안도에서 청년비밀결사 일심단(一心團)을 조직했다. 1927년 1월 신간회의 창립을 위한 발기인회가 조직되자 같은 해 2월 조선민흥회의 교섭위원 자격으로 신간회 발기인대표들과 만나 두 단체를 합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27년 2월 15일 신간회 창립대회에서는 본부 상무간사로 선출되었다. 1927년 12월에는 조선공산당 제3차 당대회[이른바 춘경원당(春景園黨)]에서 검사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8년 11월 배달청년회가 조선청년총동맹의 1군1동맹 원칙에 따라 완도청년동맹 소안지부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작성한 해체선언서 사건으로 일본경찰에 다시 검거되어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목포형무소에서 복역 중 폐결핵이 악화되어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같은 해 12월 20일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사망했다. 신간회에서는 사회단체연합장을 추진했지만 일제에 의해 금지되었다.
1963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으며 1990년 애족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