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복만(福萬). 일명 유춘수(柳春樹), 야마다[山田萬太郞]. 충청남도 천안 출신이다.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동아연초주식회사, 경성일보사에서 급사로 일하면서 상업학교를 졸업했다.
1926년 3월에 일본으로 가서 제일해상화재보험주식회사와 도쿄(東京) 아사히(朝日)신문사에서 일을 하면서 『프롤레타리아예술(プロレタリア藝術)』 등을 통해 문필 활동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1927년 봄 제삼전선사(第三戰線社) 결성에 참여했으며 제삼전선사의 기관지 『제삼전선』 발행에도 관여했다.
같은 해 7월 일본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가입했고 8월에는 서울에서 열린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 카프) 합동총회에 참석해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10월 카프 도쿄지부를 창설하고 출판부를 담당했다. 재일본조선청년총동맹, 신간회 도쿄지회에서도 활동했다.
1928년 5월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의 기관지 편집 겸 출판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29년 5월 카프 도쿄지부를 무산자사로 재편하는 데 관여했다. 그 뒤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에 가입해 프롤레타리아과학조선위원회를 담당했다. 1930년 10월 무산자연구회에 결성에 참여해 정치경제부 책임자로 선임되었다.
1932년 1월 노동계급사(勞動階級社) 결성에 참여해 공산주의 비밀 출판물의 간행을 담당했다. 4월 「조선에서의 토지 소유 형태의 변천(朝鮮に於ける土地所有の變遷)」이라는 일본어 논문을 『역사과학(歷史科學)』지에 발표해 조선 사회의 노예제 결여론을 처음으로 주장했다.
같은 무렵 김치정(金致廷) 등이 주도한 조선공산당재건투쟁협의회에 참여해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벌였다. 1933년 2월 조선공산당재건투쟁협의회 사건으로 경찰에 검거되었다가 1935년 9월 병보석으로 가석방되었다. 12월 도쿄에서 조선어 신문인 조선신문사 창립에 참여하고 편집국에 배속되었다.
1936년 4월 가석방 상태에서 열린 재판에서 징역 2년, 집행 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7월 『조선신문』 탄압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 다시 검거되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일본에서 김삼규(金三奎) 등과 함께 남북통일촉진협의회 중앙대표위원으로 평화 통일 운동을 전개했다.
광복 후 귀국해 백남운(白南雲)이 주도하던 조선학술원 회원, 민족문화연구소 연구원, 『독립신보(獨立新報)』 논설위원으로 역사 연구와 집필에 종사하면서 『조선사논집(朝鮮史論集)』(1946), 『이조사회경제사연구(李朝社會經濟史硏究)』(1948)를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