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은 김봉호(金鳳鎬). 경상북도 영주 출신.
어렸을 때 한학을 배운 뒤 농업에 종사했다. 1921년 1월 강택진(姜宅鎭)과 함께 풍기(豊基)소작조합의 창립을 주도했다. 1922년 조선노동공제회 영주지회를 창립하고 간사가 되었다. 1924년 초부터는 풍기청년회의 활동도 주도했다.
1923년 4월 조선노동연맹회 제2차 정기총회에 풍기소작조합 대표로 참석해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창립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25년 5월 무렵 경북사회운동자동맹에 참여해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7년 8월 신간회 영주지회 설립에 참여하고 조직선전부 간사가 되었다.
1928년 5월 풍기소작조합이 풍기농우동맹으로 개편되는 데 관여했으며 1929년 3월 풍기농우동맹을 다시 영주농민조합으로 확대 개편하면서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29년 4월 조선공산청년회 경북도기관을 결성하려다가 경기도 경찰부에 검거되었다.
1929년 6월 신간회 복대표(復代表)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 후보가 되었다. 1930년 6월 상주(尙州)공산당 사건에 관련되어 한때 검거되었다. 1931년 9월부터 영주적색농민조합 및 반제동맹을 결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1932년 4월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 결성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6월 인접한 경상북도 예천(醴泉)의 활동가들과 함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을 전개하다가 검거되었다. 1933년 12월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