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전반기 우리나라 사회운동은 1922년 사기공산당사건과 김윤식(金允植)사회장 찬반논쟁 과정에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람, 민족주의적인 사람, 자치운동을 지향하는 사람들로 분화되어가는 추세였다. 또한, 사회주의세력은 화요회·서울청년회·북풍회 등으로 나뉘어 각각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분파활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6월 서울청년회 계열을 제외하고 김찬(金燦)·김재봉(金在鳳)·신철(辛鐵), 상해파(上海派)의 이봉수(李鳳洙), 조선노동연맹회의 윤덕병(尹德炳)·신백우(申伯雨), 북성회의 김약수(金若水), 무산자동맹회의 원우관(元友觀)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코르뷰로(高麗局) 국내부(책임자 김재봉)와 1923년 2월 김사국(金思國)·이영(李英)·김한(金翰) 등이 서울청년회를 중심으로 결성한 고려공산동맹(책임자 김사국)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
즉, 화요회·북풍회 계열과 서울계가 대립하는 양상이었던 것이다.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는 바로 이 두 집단간의 경쟁적인 세력 확장 노력이 가속화되던 1925년 초에 계획되었다.
서울청년회계는 1925년 1월 전조선노동교육자대회의 개최를 선언했고, 화요회는 이에 대항해 2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의 개최를 선언하였다.
전 조선민중운동자대회준비회에서 밝힌 취지에 따르면, 사회주의 운동이 점차 대중화하고 있기 때문에 전조선적인 대회를 열어 운동의 조직적 통일과 근본방침을 토의하다고 하였다. 서울청년회측은 화요회측의 움직임에 대항해 3월 8일 재경조선해방운동자단체연합간친회를 열고 전조선민중 운동자반대단체전국연합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대해 화요회는 3월 15일 북풍회계인 경성청년회 등 20여 단체를 망라해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응원회를 조직하였다.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의 준비회측이 공식발표한 18일 오후까지의 참가단체는 노농단체 263개, 청년단체 100개, 형평단체 18개, 사상단체 44개 등 총 425개 단체에 대표자 508인이었다.
그러나 4월 20일에 열릴 예정이었던 집회 개최 몇 시간 전인 19일, 일제는 갑자기 집회금지조치를 내려 대회를 무산시켰다.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참가와 반대를 둘러싼 세력경쟁은 전국의 각종 단체, 즉 노동·농민·청년·사상단체를 두 편으로 분열시켰다.
전라남도의 경우 동남부 지방은 찬성, 남서부 지방은 반대가 월등히 많았다. 그것은 ‘제1·2차조선공산당’과 ‘제3·4차 조선공산당’ 으로 나뉘어 전라남도 당의 조직기반의 차이를 가져왔다. 파벌투쟁이 운동의 대중화를 어떻게 질곡시켰는가를 간접적으로 시사한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