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희(朴元熙)는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로서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와 근우회(槿友會) 등을 창립하여 민족해방, 여성해방의 이상사회를 실현하고자 헌신하였다.
1897년 충청남도 대전에서 출생하여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21년 철원보통학교 교사로 재임 중 사회주의 운동가인 김사국(金思國)을 만나 결혼하였다. 슬하에 딸이 1명 있으며, 결혼 후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 주경야독하였다. 이후 남편과 함께 간도 및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하였다. 1926년 김사국이 병사한 뒤에도 딸을 업고 다니며 사회운동에 매진하다 1928년 1월 병으로 순국하였다.
박원희는 간도에서 청년교양운동 교사로, 운동가로 헌신하였다. 김사국은 간도 용정에 동양학원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항일선전문을 배포하고 폭탄으로 일제 기관의 파괴를 계획하였다. 박원희 역시 이에 동참하였다가 1923년 체포되었으나 임신 중이었으므로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24년 귀국하여 김사국과 함께 조선청년총동맹 등 사회단체와 여성단체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924년 5월 서울에서 조선여성동우회를 창립하면서 여성의 권익향상과 계몽운동에 투신하였으며, 10월에는 고려공산동맹에도 가입하였다. 1925년에는 경성여자청년회(京城女子靑年會)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부인의 독립과 자유와 모성보호의 실현을 도모하는 조선의 딸들아, 굳세게 뭉치자"고 호소하였다. 일요강습회를 개최하여 여성들에 대한 사회교육을 실시하는 등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4월에는 중앙여자청년동맹(中央女子靑年同盟)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청소년 남녀의 인신매매 금지, 만 18세 이하 남녀의 조혼폐지, 청소년 남녀직공의 8시간 이상 노동야업 폐지, 무산아동 및 산모의 무료요양소 설립’ 등을 주장하였다. 5월에는 당시의 여성운동가가 총망라되어 근우회를 조직할 때 창립준비위원으로 참가하여 회원모집의 임무를 맡았다. 이후 교양부의 책임자로 계몽강연을 하며 각 지방을 순회하였다. 아울러 『동아일보』에 논설 등을 발표하며 여성의 사회 의식 향상을 도모하고,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분규해결에도 힘쓰는 등 쉴 새 없이 활동하였다.
박원희의 장례는 1928년 1월 10일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34개 사회단체연합장으로 거행되어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대전 현충원 애국열사묘에 남편과 합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