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녀는 황해도 해주에서 안태훈과 혼인하여 1879년 안중근을 낳았다. 이어서 안정근, 안공근 및 딸을 낳아 3남 1녀를 두었다. 남편이 1884년에 국비 일본 유학생 70여 명 중에 선발되었으나,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정부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신천군(信川郡) 두라면(斗羅面) 청계동(淸溪洞) 산골로 이주하여 은거하였다. 남편이 동학농민군 진압 과정에서 김구(金九)를 보호하게 되고,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郭樂園)을 만나 두 사람은 자매처럼 지냈다. 1896년 남편이 가톨릭에 입교하면서 가족 모두가 신자가 되었다.
남편의 사후 안중근을 따라 개화운동이 활발하였던 삼화항으로 이주한 뒤 아들들의 애국계몽운동을 보고 여성도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907년 안중근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 5월에 평안남도 삼화항 은금폐지부인회를 통해 국채보상의연금을 납입하는 등 항일구국운동에 앞장섰다. 은지환 두쌍, 은투호 두개, 은귀이개 두개, 은장도 한개, 대금 20원 등을 조성녀가 낸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이 1910년 3월 순국한 뒤 큰며느리 김아려(金亞麗)는 노령의 한인 지역에 머물러 있었고, 조성녀와 가족도 1910년 5, 6월경 노령으로 망명하였다. 『독립신문』(1920.1.31)에는 “의사의 자당(조성녀)는 해외에 온 후로 거의 영일 없이 동은 해삼위로, 서는 바이칼에 이르기까지 분주하여 동포의 경성(警醒)에 종사하였다.”고 전한다.
1920년 5월 조성녀는 가족과 상하이로 이주하여 임시정부의 김구, 이강(李剛), 김붕준(金朋濬) 등 여러 독립운동가 가족들 20여 명과 함께 살았다. 이곳에서 아이들을 돌보아 주는 한편, 이주민들에게 위로와 평강을 주는 어머니 같은 삶을 살았다. 1926년 7월에 조직된 상해재류동포정부경제후원회 위원을 역임하였으며, 동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경제후원회 창립총회에서 안창호, 조상섭(趙尙燮) 등과 함께 정위원(正委員)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그밖에도 조성녀는 언제나 독립운동계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원로 역할을 맡아 알라스카 금광의 교포 광부들의 국민회에 대한 반발을 안정시켜 주기도 하였다.
상하이에서 순국한 조성녀의 장례는 프랑스 조계에 있는 천주교당에서 교민장으로 치러졌고, 안남[越南]인 묘지에 안장됐으나, 지금은 무덤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