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락(金洛)은 예안군(경상북도 안동) 3·1만세시위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친정과 시가가 모두 항일독립운동가 집안으로, 친인척 중에 추서된 독립운동가가 무려 25명이나 된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1863년 1월 21일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내앞 마을)에서 김진란과 박주 사이에 태어났다. 19세에 진성 이씨 문중의 이중업(李中業)과 결혼했다. 1896년 시아버지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가 55세에 예안면(禮安面) 의병장을 맡으면서 삶이 크게 변했다. 1907년 안동에 협동학교가 생기고 큰 오빠 김대락도, 형부 이상룡도 계몽과 개혁이라는 시대의 흐름에 앞장섰다. 1910년 8월 망국 때 시아버지가 단식으로 순국한 뒤 남편과 맏아들이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남편 이중업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냈으나 세계적 주목을 받지 못하자 다시 중국에 청원하기 위한 작업을 주도하다 58세에 작고하였다. 김락도 58세의 나이로 예안의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었으며, 이 때 받은 고문으로 두 눈을 실명하였다. 고통 속에 두 번이나 자결 시도를 하였으면서도 11년간 두 아들의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였다. 1929년 2월 12일 별세하였다.
김락이 참여한 예안 3·1만세시위는 고종인산에 참가했던 이동봉(李東鳳)·이용호(李用鎬)·김동택(李東澤)·신응한(申應漢) 등이 서울의 시위를 직접보고 돌아와 그 소식을 전하면서 계획이 추진되었다. 3월 17일 오후 3시 경 30여 명의 군중이 면사무소 뒤편 선성산(宣城山)에 올라가 일본이 세운 '어대전기념비(御大典紀念碑)'를 쓰러뜨리는 것을 시작으로, 시장 주변에 모여 있던 3개의 시위대 100여 명이 일제히 시장을 향하여 진격해 갔다. 시위대는 미리 정보를 탐지하고 수비대까지 동원한 일본 경찰의 진압에도 굴하지 않고 이동봉의 인솔 하에 예안주재소로 몰려갔다. 그러나 주동자를 비롯한 15명이 체포되었으며, 시위 군중들이 해산 당하였다. 오후 6시경, 다시 격분한 시위군중들이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로 몰려왔다. 경찰의 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15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돌멩이와 기왓장을 던지면서 주재소로 밀고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다시 25명이 체포되었다.
3월 22일 다시 2차 시위가 일어나 오후 7시에 약 2000명의 민중들이 태극기를 들고 동부동과 서부동, 선성산 위에서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일본 경찰의 발포로 13명이 부상을 입고 3명이 체포되었는데, 김락도 그 중 한 명이었다.
2001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