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복영(池復榮)은 지청천(池靑天) 장군의 딸로서 한국광복군 및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본관은 충주(忠州)이다.
1919년 4월 서울 종로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버지는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池靑天)이다. 2남2녀 중 둘째로, ‘복영’이라는 이름은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 지청천을 만나기를 소망한다는 뜻으로 지었다 한다. 지청천이 일찍이 중국으로 망명한 후 일제의 감시가 계속되자 어머니와 3남매도 1924년 만주로 이주하였다. 서울에서 삯바느질로 연명하던 어머니는 이제 농사로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지복영은 6살에 검성중학교 부속 소학교에 다니며 공부에 열성을 가졌다. 그러나, 만주에서 1~2년 마다 거주지를 옮겨야 했고, 한얼소학교에서 참 배움을 얻었다고 한다.
만주사변 후 14세 되던 1933년 가족들은 낙양군관학교 입학생들과 함께 중국 관내로 이주하였다. 이때 지복영은 중국어를 잘 하여 중국인 행세를 하며 살기도 하였다. 중국인 학교 재학시 귀화 권유를 받았으나, “내 나라가 주권이 없어 지금 중국에서 유랑생활을 하지만 조선은 반드시 독립된다고 믿는다. 그러면 내가 떳떳이 한국 사람으로 살 수 있는데 무엇이 답답해서 중국인으로 살겠느냐” 하면서 거부하였다. 이후 광복군 활동을 하고, 해방 후 귀국하였다.
1937년 남경 함락과 중일전쟁이 확전되자 임정의 피난길에 동행하고 이후 광복군에 입대하여 초모 활동 등을 하였다. 지복영은 1939년 한국광복군진선청년공작대 활동으로 항일선전 연극, 전단 제작, 벽보 부착 등에 동참하였다. 1940년 9월 광복군이 창설됨에 따라 오광심(吳光心), 김정숙(金貞淑), 조순옥(趙順玉) 등과 함께 광복군에 입대하여, 김학규 장군이 이끄는 징모6분처 초모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1월에 총사령부가 충칭(重慶)에서 시안시(西安市) 이부가(二府街)로 이동하자 따라 갔다. 1942년에 광복군 제3지대에 배속되어 초모위원 겸 비서로 안휘성 부양(阜陽)에서 활동하다가, 결핵으로 후방에 배치되었다. 1944년에는 임시정부 선전부 자료과와 선전과에 복무하면서 대적방송 담당 요원으로 선전방송을 하고, 원고를 작성하는 등 활발한 활동에 소령으로 진급도 하였다. 1945년 4월 임정 회계검사원 및 조리원(助理員)에 임명되어 겸직 근무를 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해방 후 1946년 서울대학교 도서관 사서로 처음 취직, 교육 사업에 대한 꿈도 가졌으나 실현할 수 없었다. 1950년 6·25전쟁 중에 결혼하여 첫 딸을 출산하고, 부산 화교학교 교사로 정착하였다. 퇴임 후 부친과 함께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찾아 1995년에 『역사의 수레를 끌고 밀며- 항일독립운동과 백산 지청천 장군』을 발간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