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8월 3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충남 예산의 양반가 출신인 아버지는 딸을 공부시키지 않았으나 정정화는 오빠의 어깨너머로 천자문, 소학 등을 어려서부터 다 익힌 총명한 소녀였다. 안동 김씨의 명문가 김가진(金嘉鎭)의 맏아들 김의한(金毅漢)과 혼인한 뒤에 신학문도 배웠다. 1919년 3 · 1만세시위 직후 대동단(大同團) 총재를 맡아 상하이로 망명한 시아버지와 남편을 따라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정정화는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맡아 하였으며, 1934년에는 지방행정관이 된 남편을 따라 장시성[江西省]에도 잠시 머물렀으나 다시 임정에서 활동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서도 힘든 생활은 계속되었으나, 1991년 11월 2일 별세하기까지 그녀의 애국애족 정신은 후손을 통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정화는 중국 생활 27년 동안 자신의 가족은 물론 이동녕(李東寧), 김구(金九) 등 임정 요인과 가족들의 삶이 그녀의 손에 달렸다 할 만큼 부지런하고 알뜰히, 돌보고 보살폈다. 또 임정의 재정을 지원하기 위하여 1930년까지 10여 년간 6회에 걸쳐 국내로 밀파되었다. 일제의 삼엄한 경계 속에 상하이 임정과 국내의 비밀 연락을 담대한 용기와 지혜로 충실히 수행해 낼 수 있었다.
1932년 윤봉길의 홍커우[虹口]공원 의거 후, 임정이 저장성[浙江省] 자싱[嘉興]으로 이동한 뒤에도 정정화의 힘겨운 노력은 계속 되었다. 1935년에 임정의 한국국민당에 가입, 공식적인 단체 활동에 투신하였다. 1940년 충칭[重慶]의 한국독립당 광복군 창립에 남편과 같이 참여하였다. 또한 한국혁명여성동맹((韓國革命女性同盟)을 조직하여 간사를 맡아 활동하면서 독립운동가 자녀들을 위한 3 · 1유치원 교사도 하는 등 항일민족독립운동에 열정적으로 헌신하였다.
1943년 2월에 대한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 재건대회에서 훈련부장에 선출되자 국내외 한인 여성의 총단결을 역설하였다. 방송을 통하여 국내외 여성들의 각성과 협력을 촉구하는 한편, 위문 금품을 거두어 일선의 독립군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적진 중에 있다가 포로수용소를 통하여 넘어오는 동포 여성들을 계몽 교육하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멀리는 미주 한국여성단체들과 긴밀한 연계 속에 재미 동포들의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성원도 촉구하였다.
1982년 대통령표창에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