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6월 평양에서 각각 조직된 북장로교파 애국부인회와 감리교파 애국부인회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정목(金貞穆)과 김순일(金淳一)의 권유에 따라 같은 해 11월 연합, 독립군자금을 모금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내기 위해 조직하였다.
평양에 두기로 한 연합회 본부 임원은 양쪽 파에서 공평하게 선임하기로 하였다. 지방에 있는 각 부인회를 지회로 흡수하기로 하였으며, 부인회가 없는 지방은 각 교파의 부인 유지에게 권유하여 지회를 설립하도록 하였다.
연합회 본부의 총재는 상해(上海)의 임시의정원 의장 손정도(孫貞道)의 어머니 오신도(吳信道), 회장은 최순덕(崔順德)·안정석(安貞錫), 부회장은 한영신(韓永信), 재무부장은 정월라(鄭月羅)·조익선(趙益善), 적십자부장은 이성실(李誠實)·김신희(金信喜)·홍활란(洪活蘭), 서기는 최명실(崔明實)·최매지(崔梅智)·이겸량(李謙良) 등이 역임하였다. 임원은 교사와 교회의 전도부인 등이 중심을 이루었고, 회원은 100여 명이었다.
평양 감리파지회·장로파지회, 진남포 감리파지회·장로파지회, 강서군 감리파지회, 함종 감리파지회, 증산 감리파지회를 두었는데, 지부의 독립성이 강해 대한애국부인회는 서북지방 애국부인회의 협의체적 성격을 띠었다.
회원 및 동지들로부터 2,400여 원의 군자금을 모금하였는데, 일부 임원은 가지고 있던 금·은가락지를 희사하기도 하였다. 이 가운데 2,100여 원은 김정목과 김순일을 통해 두 차례로 나누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보냈으며, 나머지 300여 원은 회의 경비로 사용하였다. 1920년 10월 조직의 활동이 일제에 노출되어 임원들이 붙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