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낙원은 김구의 어머니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후원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 독립운동가이다. 1859년(철종 10)에 태어나 1939년 사망했다. 김구가 치하포사건으로 수감되었을 때 옥바라지를 했으며 신민회에 연루되어 수감되었을 때에 구명운동을 했다. 김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할 때 독립자금을 송금하였으며, 손자 둘을 데리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장손 김인을 군관학교에 입교시켰으며,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에서 청년을 돌보며 고락을 함께 하였다.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평생동안 김구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지하였다.
백범(白凡) 김구(金九)의 어머니로,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김구의 임시정부 활동과 독립운동을 직 · 간접으로 지원, 격려하였다.
곽낙원은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살면서 지역과 신분에 대한 차별의식을 갖게 되었다. 김구를 낳기 전까지 남편에 대한 애정도 삶의 희망도 별로 없이 김구를 공부시켜 출세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꿈이었다. 그러나 김구가 동학에 입도하면서 곽낙원도 반일감정이 싹텄으며, 치하포사건으로 반일의식이 성장하였다.
치하포사건이란 김구가 명성황후의 시해를 복수하고자 1896년 3월 황해도 안악의 치하포에서 일본인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죽인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김구가 감옥에 있을 때 곽낙원은 남편 김순영(金淳永)과 함께 옥바라지를 하였다.
그 뒤 1911년에 김구가 신민회(新民會)에 연루되어 다시 15년형을 받자 구명운동을 했으나 여의치 않자 항일의식도 더욱 커졌다. 한편 곽낙원은 며느리 최준례의 영향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 김구를 따라 기독교에 귀의하였다. 이에 평안도, 황해도 지역 기독교인들의 반일민족 사상에도 적잖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곽낙원은 1922년 김구가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함께 지냈다. 그러나 며느리가 일찍 병사하자 곽낙원은 1925년 12월에 다시 안악으로 돌아와 손자들을 돌보며, 생활비를 절약하여 김구에게 송금하는 등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일경의 감시를 피해 1934년 3월 다시 손자 둘을 데리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 도착한 후 장손 김인을 군관학교에 입교시키는 한편,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에서 군사훈련중인 청년 20여명을 돌보는 등 고락을 함께하였다.
제때 식사를 잇지 못할 정도의 곤핍한 생활 속에서도 생활비를 아끼고 생신축하금으로 단총 2정을 구입, 독립운동에 쓰도록 하는 등 별세하기까지 김구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또한 청년들에게 “오늘 신문 읽었나? 왜놈이 또 어데까지 밀고 들어 왔나? 비행기 공습이 심하다지” 등 전황에 깊은 관심을 표했다. 때문에 청년들은 중일전쟁의 전세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팔순 잔치 대신 총보다는 붓으로 일본과 싸우라는 의미에서 50자루의 만년필을 사서 청년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언제나 독립 의지가 꺾이지 않도록 사기를 북돋아 주었던 것이다.
곽낙원은 언제나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사고를 가지고, 임시정부내에서 어른으로서,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해냈다. 손자를 고아원에 맡겨야 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울 때는 변절한 독립운동가의 가정을 부러워한 적도 있었으나, 독립에 대한 희망은 버리지 않았으며, 김구와 임정의 독립운동을 한결 같이 지지, 격려하였다. 노년에는 항상 구국기도와 찬송가를 부르면서 어려운 일상을 이겨나갔다. 1939년 4월 26일 평생소원이던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중국 쓰촨성〔四川省〕 충칭〔重慶〕에서 병사하였다.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