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하포 사건은 1896년 3월 9일 백범 김구가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인 스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는 대의명분을 이유로 살해한 사건이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이어졌다. 김구는 청나라에 가려다가 실패하고 치하포에 머무르고 있던 중에 일본인 스치다를 비록 조선인으로 위장하기는 했으나 실상은 칼을 차고 밀행하는 왜인으로서 우리 국가와 민족에 해를 끼치는 독균과도 같은 존재로 판단하고 살해하였다. ‘국모의 원수에 대한 복수’를 명분으로 내건 김구의 의거에 대해 조선 정부 및 고종황제가 소극적으로 대처하여 김구는 사형을 면하였다.
1895년 10월 일본군과 낭인(浪人)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고 뒤이어 친일 갑오개화파 정권에 의해 단발령이 선포되자 그에 저항하는 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얼마 후인 1896년 2월 11일에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이어졌다. 김구(金九)는 전 동학 농민군 지도자 김형진(金亨振) 등 동지와 더불어 청국으로 가 중국 북동부 지역의 반일 인사들과 연합 작전을 준비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발걸음을 되돌리게 되었다.
김구는 1896년 3월 8일 평남 용강군(龍岡郡)에서 배를 타고 인접한 황해도 안악군(安岳郡) 치하포(鵄河浦)로 가서 이화보(李化甫)가 운용하는 여점(旅店)에 머물게 되었다. 그는 마침 같은 여점에 있던 일본인 스치다 조스케를 다음 날인 3월 9일 아침에 살해하였다. 이것이 치하포사건이다.
김구는 무역상인 또는 약장사[賣藥商人]로도 언급되는 스치다를 비록 조선인으로 위장하기는 했으나 실상은 칼을 차고 밀행하는 왜인으로서 우리 국가와 민족에 해를 끼치는 독균과도 같은 존재로 판단했다. 마침내 그를 살해한 뒤에 소지품을 뒤져 보고 그가 일본군 육군중위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김구는 스치다를 타살했다는 포고문과 함께 자신의 거주지와 성명을 써 놓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치하포사건이 일어난 직후 3월 12일 스치다를 수행했던 조선인 통역 임학길(林學吉)이 평양으로 도피하여 그 곳에 있던 일본 경성영사관 경부(警部) 히라하라 아쓰무[平原篤武]에게 신고하였다.
이에 히라하라는 3월 15일 치하포사건 현장에 도착하여 지방관에게 범인의 체포를 의뢰하였고, 일본영사관도 외부(外部)에 신속한 범인 체포를 촉구하였다. 그 결과 안악군 보고를 토대로 해주부는 범인이 김창수(金昌洙: 김구의 아명)임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소극적인 조선 정부의 입장에 따라 김구의 체포는 몇 달 동안 지연되었다. 이에 일본 인천영사관은 6월 5일 3명의 순사를 평양 지역에 파견하여 사건 조사를 실시하였고, 6월 22일 마침내 점주 이화보를 체포하였다. 김구도 6월 21일(음력 5월 11일) 자신의 집에서 체포되어 해주부로 호송되었다. 해주부에서는 6월 27일 비로소 심문을 개시하였다.
그런데 일본영사관은 인천항재판소에 치하포사건은 외국인의 생명과 관계되는 사건이므로 외국인 관련 재판을 담당하는 인천감리서에서 심문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조회하였고, 그 내용을 인천항재판소가 외부에 전달하였다.
그 결과 해주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김구는 인천감리서로 압송되어 이곳에서 8월 31일, 9월 5일, 9월 10일 세 차례에 걸쳐 일본인이 배석하는 합동 신문을 받게 되었다.
3차례의 진술[공초(供招)]에서 김구는 스치다 살해 동기와 살해 방법을 밝혔는데, 동기는 ‘국모의 원수에 대한 복수’를 하고 나라의 수치를 조금이나마 씻고자 하는 것이며, 방법은 발로 차 마당에 쓰러뜨리니 그가 칼을 뽑기에 돌로 쳐 넘어뜨리고 칼을 빼앗아 죽였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영사대리 하기와라 슈이치[萩原守一]는 9월 12일 『대명률(大明律)』의 ‘인명모살인(人命謀殺人)’에 관한 조항을 적용하여 김구를 참형(斬刑)으로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인천감리 이재정은 또한 10월 2일 법부에 사건의 조속한 처리를 전보로 요청하였다. 그러나 법부에서는 국왕에게 마땅히 상주하여 칙명을 받아야 할 사안이라는 답전을 인천감리에게 보냈다.
그로부터 20일 뒤인 10월 22일 법부는 김구에 대한 교형(絞刑)을 국왕에게 건의하였다. 그러나 국왕이 이를 재가하지 않았고, 이후 12월 31일 상주안건을 거쳐, 김구가 제외된 1897년 1월 22일 최종 상주안건이 재가되어 김구는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이후 수감 생활을 이어가던 그는 1898년 3월 19일 탈옥을 감행하여 성공하였고, 아버지가 대신해서 수감되었다가 그로부터 1년 후인 이듬해 3월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