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성칠의 난은 ‘제1차 제주민란’이라고도 하며, 제주목사 이병휘(李秉輝)의 가혹한 징세가 주요 원인이었다. 화전세(火田稅)와 목장세(牧場稅), 호포(戶布), 환자〔還上〕의 지나친 징수를 시정해 달라며 1898년 2월 22일 장두(狀頭) 방성칠과 광청리(光淸里) 주민 수백여 명이 제주목 관아에 몰려와 소장(訴狀)을 제출하였다. 이에 목사 이병휘는 시정 약속을 하였고 난민들은 자진해산하였다. 그러나 목사는 오히려 방성칠을 잡아들이고 비밀리에 60여 명의 장정들을 조천리에 불러 모았다. 이에 분개한 지역민들이 다시 봉기하면서 민란으로 확산되었다.
민란은 전라남도 출신으로 1891년 제주도에 들어 온 방성칠(房星七)이 주도하였다. 그는 친군(親軍)을 구성하고 통문(通文)을 돌려 민심을 고무하고 매 가호 당 장정 1명씩 강압적으로 참가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각기 머리에 흰 두건을 쓰고 ‘남자(南字)’를 각인한 목봉(木棒)을 들고 2월 28일 제주성으로 향하였고, 29일 성 내에 들어갔다. 이 ‘남자(南字)’를 근거로 이 민란이 남학당(南學黨)이라는 종교 조직에서 주도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때 목사와 대정군수 채구석(蔡龜錫)은 구타를 당한 후 성 밖으로 쫓겨났고, 수서기(首書記) 문주호(文周昊)가 구타로 사망하였다. 성을 점거한 난민들은 관아를 부수고 공문서와 관인을 소각하였다.
3월 2일 민란 지도부는 “제주 · 대정 · 정의의 세 군수를 혁파하고 환자〔還上〕를 절반으로 줄인다”는 내용의 방문(榜文)을 성 내에 붙였다. 또한 각 마을에 전령을 보내 도내의 모든 배를 뭍으로 끌어올려 묶어놓아 육지와의 연락을 두절시켰고, 호고(戶庫)를 열어 쌀을 풀고 무기고의 창과 검을 꺼내어 중민을 무장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성내의 양반들은 5일 조천으로 도망하여 그곳의 양반들과 합세하여 토벌군을 구성하였지만, 방성칠 등의 선제공격을 받아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흩어졌다. 이후 방성칠 등 지도부는 장기 전략을 모색하면서 무너진 성과 무기를 보수하고 예상되는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 정의현감 홍재진(洪在晉) 등이 전열을 재정비하고 창의군을 모아 방성칠 등 지도부가 성을 비운 사이에 성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때 민란에 가담했던 최형순(崔亨順) 등이 도망하여 그들과 합세하면서 방성칠 부대의 사기와 전력은 급속히 떨어졌다. 그 결과 방성칠이 이끄는 부대는 애월읍 귀리(貴里)로 퇴각하였고, 추격해 온 토벌군에게 궤멸되고 이때 촌가로 피신하였던 방성칠도 4월 4일에 처단되었다. 1만여 명 이상이 참가한 민란은 3년 후인 1901년의 제2차 제주민란, 이른바 ‘이재수(李在秀)의 난’에 큰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