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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민간단체나 개인이 같은 종류의 기관 또는 관계가 있는 인사 등에게 공동의 관심사를 통지하던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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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에 민간단체나 개인이 같은 종류의 기관 또는 관계가 있는 인사 등에게 공동의 관심사를 통지하던 문서.
내용

서원·향교·향청(鄕廳)·문중(門中)·유생(儒生)·결사(結社)와 의병, 혁명이나 민란의 주모자들이 대체로 연명(連名)으로 작성하여 보냈으며, 그 내용은 통지·문의·선동·권유 등 다양하다. 일반 서신과 다른 점은 개인이나 단체가 어떤 사실이나 주장을 다수에게 공개적으로 전달하는 데 있다.

또한 백성의 억울한 사정이나 개인들간의 분쟁 해결을 관청에 호소하는 소지(所志)나 국왕에게 의견을 올리는 상소와 구별되는 점은 그 목적이 백성간에 서로 수평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하여 여론을 형성시키고자 하는 데 있다. 통문은 송신자나 내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통용된 것 중의 하나는 서원·향교·유림에서 보낸 것으로, 이를 ‘유통(儒通)’이라고 하였다.

유통은 서원을 중심으로 하여 유생들에게 돌리는 글로서, 서원의 건립이나 보수, 효자·열녀·충신들의 정문(旌門:충신·효자·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 집 앞에 세우는 붉은 문. 작설. 紅門) 건립 또는 증직(贈職) 등의 표창 건의, 문집의 발간, 향약계의 조직 등에 대한 내용이 많다.

특히 유회(儒會)·당회(堂會)에서 돌렸던 통문은 그 영향력이 막대하였는데, 이들 기관들은 제향(祭享)과 강학(講學)이라는 서원의 주요 기능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던 것이나 정치·사회 문제 등에 대한 재야 유림들의 여론을 결집하여 공식화하는 거점이 되었다.

시국에 관한 중요 문제, 특히 대의명분에 관계되는 문제가 사림(士林)에 발생하였을 때 회합을 가졌는데, 그 날짜와 장소·의제, 회합의 결과까지 통문으로 발송하여 10일이면 나라 안에 모두 전파되었다.

또 이들 유림들은 때로 이른바 ‘청의(淸議)’라고 하는 일종의 정치여론을 조작하는가 하면, 당쟁에 뛰어들어 암투를 조장하는 동시에 반대파를 비난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때에도 통문이 그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1626년(인조 4) 6월 영남의 유생들이 통문을 돌려 관찰사를 성토하여 마침내 방백(方伯), 원탁(元鐸)을 물러나게 한 일이 있으며, 그와는 반대로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도의 감사 김성일(金誠一)이 좌도의 감사로 제수(천거에 의하지 않고 임금이 직접 관리를 임명하는 일)되자 우도 사민(士民)들이 통문을 돌려서 향교에 모여, 김성일을 머물러 있게 하여 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렇듯 통문은 지방관의 진퇴문제를 논의하는 매체로도 이용되면서 숙종 이래 더욱 성행하여 국정을 좌우할 정도로 그 영향력이 커지자, 이러한 폐단을 규제하기 위해 조정에서 이를 엄히 다스렸다.

즉, ≪속대전≫ 형전(刑典) 추단(推斷)에 “유생이 토주(土主:고을의 수령)에 발악하거나 성묘(聖廟) 또는 관문 밖에서 회곡(會哭)하는 경우에는 장 100과 유형 3,000리에 처한다. 다만 통문에 참여한 경우에는 도배(徒配:도형에 처한 뒤에 귀양을 보냄)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이유는 집단적으로 호소하는 등장(等狀)이나 대궐문 밖에서 재야 유림들의 시위형태인 복궐(伏闕) 등도 미리 통문을 돌려 합의가 이루어져 행하여지는 것이었으며, 만인소(萬人疏)도 각 지방에 통문을 돌려서 지지자의 서명을 받아야만 비로소 가능했기 때문이다.

한편, 임진왜란·병자호란 때에는 모병(募兵)과 군량의 조달을 위하여 구국의 통문들이 작성되어 의병의 조직화에 이바지하였는가 하면, 민란이나 혁명을 일으키려 할 때에도 거사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협력을 촉구하는 내용의 통문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전봉준(全琫準)은 각 처의 동학접주와 농민들에게 통문을 돌려 많은 호응을 받았고, 전봉준이 체포되자 동학도들은 교조의 신원(伸寃:원통한 일을 푸는 것) 운동을 전개하면서 역시 통문을 이용하였다.

그에 앞서 17, 18세기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란 당시에도 그 주모자들이 통문을 많이 활용하였는데, 이를 작성할 때 수모자(首謀者:주모자 중의 우두머리)가 누구인지 알아보기 어렵도록 사발(沙鉢)의 형태로 둥글게 돌아가면서 연명자들이 서명한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통문을 ‘사발통문’이라 하였다.

1893년(고종 30) 11월 전봉준도 20여 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봉기(蜂起)를 맹약하는 내용을 알릴 때 사발통문으로 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침략행위를 배척하는 내용의 통문들이 전하여오는데, 그 중 1895년 안승우(安承禹)·유인석(柳寅錫)·곽종석(郭鍾錫)·권세연(權世淵) 등의 의병운동에서 나타난 각종의 격문(檄文)을 비롯한 창의문(倡義文), 예안·안동 등지의 통문 등이 그것이다.

또, 1904년 6월 김기우(金箕祐) 등 32명이 발기하여 작성한 제1차 배일통문(排日通文)은 철도 부설에서 일어난 일본의 작폐를 비롯하여 국권의 침탈과 이권의 착취, 그리고 북진하는 일본군의 야욕 등을 지적하여 총궐기를 부르짖는 내용이다.

이 통문은 널리 배포되어 크게 애국심을 불러일으켰고, 일본은 그를 체포, 엄벌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윤병(尹秉)·허위(許蔿) 등이 잇따라 전국에 배일 통문을 발송하였고, 또 1905년 10월 김동필(金東弼) 등 26명이 발기한 유회소(儒會所)의 13도 유생 대표의 배일 통문이 역시 작성된 바 있다.

이 밖에 문중에서 발하는 통문은 종중회의(문중회의)의 통보나 족보의 출판문제 등에 관한 것이 많았으며, 보부상(褓負商)과 같은 결사에서 그 회원들에게 보내는 통문은 그 전달속도가 매우 신속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계 모임 등에서 그 계원에게 집회 일시 및 장소와 목적을 알리는 통지문도 통문의 일종인데, 이를 회문(回文)이라고도 불렀다.

통문은 대체로 여러 사람들의 연명으로 보내졌는데, 그 이름 앞에 직함을 쓰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통문을 지은 사람을 제통(製通)이라 하고 필사한 사람을 사통(寫通)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의 명단이 명시된 경우도 있다.

간혹 통문을 위조하거나 남의 이름을 사칭하여 넣는 경우도 있었는데, 1777년(정조 1) 홍천주(洪天柱)라는 사람이 충렬사(忠烈祠)를 중수한다고 빙자하여 금품을 거두어들이고, 빼앗기 위하여 재상 명의의 통문을 위조하여 각 고을을 돌아다니면서 재물을 거두어들인 사건이 있었다.

한편, 일부 서원에서도 통문을 악용하여 백성들에게 억지로 금품을 거두어 들이려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서원에 제수전(祭需錢)이 필요하니 모일(某日)까지 얼마를 봉납하라.”는 내용에 이른바 까막패자〔墨牌〕라 불리던 묵인이 찍힌 통문을 돌려, 이에 응하지 않으면 사형(私刑)을 가하기도 하였다.

특히, 화양서원(華陽書院)의 이러한 통문은 협박장이나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1862년(철종 13) 3월에 화양서원에서 원우(院宇)를 수리, 개축한다 하여 전라도지방까지 진출하여 재화를 징수하므로 백성들의 원망이 대단하였다. 공주향교의 유림들이 분개를 느껴 그 진상을 상세히 알려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으로 보낸 통문이 전한다.

통문의 서식은 서두에 ‘通文’이라고 제호처럼 쓰고, 줄을 바꾸어 ‘右文爲通諭事段……(우문위통유사단……)’이라는 문구로 시작하여 본론을 말한 다음, 모일 장소나 일시를 쓰고 ‘……千萬幸甚(……천만행심)’이라는 글귀로 끝을 맺으며, 수신처·발신연월일·발신처 및 발신자 명단을 차례로 열기(列記)하였다.

간혹 통문 한쪽 모서리에 “이것을 일일이 돌려보되 고을 안에서 지체하지 말기를 바라오.” 또는 “차례로 돌려본 뒤에 마지막에는 다시 보내주시오.”라고 첨서되어 있었던 바, 이는 여러 사람이 차례로 돌려보도록 한 회문과 같은 성격을 가지는 것이었다.

문체는 순한문이나 이두문이 많이 섞여 있는 것이 특색이었으며, 동네 계 모임 등의 통문 가운데에는 순한글로 쓰여진 것도 있었다. 통문은 특정한 내용을 널리 알리는 커뮤니케이션 매체로서, 대중매체가 없었던 조선시대에 비교적 신속하고 정확하게 통고·통지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관에서는 통문의 형식을 사용하지 않고 주로 일반 백성들이 이용하였기 때문에 거의 순수한 민간매체였다는 점에서 그 커뮤니케이션사적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속대전』
『추관지』
『대동야승』
『항일선언·창의문집』(유광렬, 서문문고, 1975)
『항일의병장렬전』(김의환, 정음사, 1975)
『한국고문서연구』(최승희, 지식산업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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