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8월 1일 호놀룰루(Honolulu)에서 국민회(國民會)가 발행하던 『신한국보(新韓國報)』를 개제하여 발행한 신문이다.
『신한국보』는 당시 하와이의 교민단체가 통합되어 결성된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가 1909년 2월 1일 미국 본토 캘리포니아지역의 공립협회(共立協會)와 연합단체를 구성하여 국민회로 되면서 1907년 10월 17일 창간한 그 기관지인 『한인합성신보(韓人合成新報)』를 1909년 2월 15일 개제하여 발행한 신문이었다.
따라서, 그 후신인 『국민보』는 매호 상단에 ‘1907년 10월 17일 창간’이라는 것을 명기하였다. 체재는 타블로이드 배대판(倍大版) 4면, 7단제로 발행하였다. 처음에는 『신한국보』의 주필이었던 홍종표(洪宗杓)가 주간이었으나, 그 뒤 당시 하와이의 지도자였던 박용만(朴容萬)이 주필로서 제작에 참여하였다.
한때는 이승만(李承晩)이 그 제작의 지도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승용환(承龍煥) · 김현구(金鉉九) 등 많은 정치가들이 이 신문의 중요직을 담당하였다. 1946년 12월에는 백일규(白一圭)가 미국 본토로부터 와서 약 2년간 주필을 맡았다.
이 신문은 하와이에서 우리 말로 발행된 신문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면서 독립운동과 문맹퇴치 및 지식보급 등 교민의 계몽활동에 크게 공헌하였다. 따라서, 조국과 재미교포들의 소식을 상세히 알려 주는 보도적 기능에도 충실하였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의 발발로 하와이에서 영어 이외의 모든 외국어 신문의 발행이 금지되어 1941년 12월 10일 문을 닫아야 했다.
1942년 1월 21일부터 1944년 2월 2일까지의 기간에는 국민회와 이승만계열의 동지회(同志會)가 합동으로 제호를 ‘국민보-태평양주보(Korean National Herald-Pacific Weekly)’로 고쳐서 다시 발행해 오다가 1944년 2월 9일부터는 『태평양주보』와 분리하여 다시 『국민보』로 복간하는 한편, 영문 1면을 추가하였다. 이 영문면은 1945년 1월 31일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국문판 신문을 보려는 독자의 감소로 1968년 12월 결국 폐간하고, 그 대신 국문과 영문으로 된 『국민회회보』를 발행하여 회원에게만 배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