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1월 2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교포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의 기관지로 창간되었다. 사장은 안창호(安昌浩), 주필은 송석준(宋錫俊)이었다.
처음에는 활자를 갖추지 못하여 손으로 필사하여 순국문으로 석판인쇄하여 매월 2회 발행하였다. 1907년 4월 26일자(제2권 제1호)부터 활판으로 인쇄하여 주간신문 형태로 발행하였다.
이때부터 편집 겸 발행에 정재관(鄭在寬), 인쇄는 이교담(李交倓)이 맡았으며, 신문체제도 새롭게 하여 순한글판으로 4단제 4면으로 발행하였다.
이 신문의 발간목적은 미국에 머물고 있는 동포들에게 민족정신 고취와 국권회복운동을 보도하는 데 있었으며, 국내에도 널리 보급하고자 노력하였다.
창간호 논설에서도 밝혔듯이, 매호마다 국권회복과 자주독립을 강력하게 내세우며 단순한 보도기관으로서 만족하지 않고, 지식의 계몽기관으로서의 구실을 중시하였다. 또한, 국내의 민족지들의 동태에 대해서도 항상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찬사와 격려를 아끼지 않아, 1907년 『제국신문(帝國新聞)』이 재정난에 빠졌을 때는 의연금 모금을 하였고,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애국정신에 대해서도 크게 보도하였다.
한편, 1908년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 마켓가(街)에서 의사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에 의하여 피살된 스티븐스(Stevens,D.W.)사건을 3월 25일자 신문에서 크게 보도함으로써, 미국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알리고,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호의적인 여론을 조성하게 하였다.
보급망으로는 미국본토 이외 지역의 배포를 위하여 하와이에 4개 소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1개 소의 보급소를 두었다. 본국에는 서울을 비롯, 전국 32개 보급소를 통하여 국내 독자들에게 배포되어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1908년 4월 일제가 「광무신문지법(光武新聞紙法)」의 단속규정을 강화하여 해외에서 발간되어 국내에 유입되는 동포신문도 통감부에서 통제함에 따라 빈번하게 압수, 또는 발매금지를 당하였다. 공립협회가 1909년 2월국민회(國民會)로 개편, 통합됨에 따라 합성협회 기관지 『합성신보』와 공립협회 기관지 『공립신보』(제118호까지 발행)가 통합되어 1909년 2월 10일 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제119호)로 발간되었다. →신한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