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6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교포단체인 한국국민회(韓國國民會)의 기관지로 창간되었다.
그 곳에서 발행되던 ≪해조신문 海朝新聞≫이 운영난으로 폐간된 뒤 바로 나왔다. 사장에 차석보(車錫甫), 편집인에 유진율(兪鎭律), 주필에 윤필봉(尹弼鳳)이 참여하고, 발행인의 명의를 러시아의 퇴역장성이며 변호사였던 미하일로프로 하여 매주 일요일과 수요일 2회씩 발간하였다.
1908년 당시 러시아에는 한국인들의 이민이 크게 증가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하는 연해주에 한국인 수가 4만5900명에 달하고 있었다. 배포는 러시아에 사는 교민사회뿐만 아니라, 시베리아·상해·미주·하와이·멕시코 등지에까지 발송되었고, 국내에도 비밀리에 우송되어 읽혔다.
그러나 논설과 기사내용이 통감부 당국의 비위를 거스릴 때는 대량으로 몰수되었으며, 특히 1909년 한 해만 해도 57건에 2,235부나 되었는데, 이는 거의 매호 빠짐없이 압수처분을 받은 것이다.
자주독립정신과 국권회복을 고취하는 논설과 기사가 매호마다 실려 해외에 거류하는 동포뿐만 아니라 국내의 독자에게도 커다란 감명과 영향을 주었으나, 어려운 여건 속에서 발행되었기 때문에 재정난으로 휴간하는 일도 많았다. 대동공보사(大東共報社)는 연해주지방 독립운동의 구심점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1909년 안중근(安重根)이 이토(伊藤博文)를 포살할 때도 그 곳에서 모의가 극비리에 이루어졌으며, 한때 안중근도 ≪대동공보≫에 기사를 기고하여 애국심을 고취하기도 하였다.
1909년 유진율이 러시아에 귀화하여 니콜라이 유가이라는 이름으로 발행인 명의를 바꾸고 주필에 이강(李剛)이 취임하였다.
1910년 재정난이 격심하여 휴간하게 되자 거부이며 독립운동가였던 최재형(崔在亨)이 매월 거금을 희사, 사장에 취임하게 되고, 일부 진용이 바뀌어 부사장에 이상운(李尙雲), 총무에 김규섭(金奎燮), 재무에 차석보, 편집 겸 발행인에 유진율이 각각 취임하였고, 미국에서 온 정재관(鄭在寬)은 객원기자로 일하였다.
1910년 8월 18일 ≪대동신보 大東新報≫라고 개제하였으나, 지령은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외교적 농간으로 그 해 9월 10일 러시아 총독의 명령에 따라 정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