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6월 2일 대한협회(大韓協會)가 창간하였다. 대한협회는 1908년 4월에 창간한 월간 ≪대한협회회보 大韓協會會報≫를 이듬해 3월까지 12호를 발행한 뒤 중단하고 일간으로 변경, 이 신문을 발간하였다. 처음 제호를 ‘대한공보(大韓公報)’로 할 계획이었으나 내부(內部)에 허가를 신청하면서 ‘대한민보’로 고쳤다.
사장에는 ≪만세보 萬歲報≫의 사장을 지낸 오세창(吳世昌)이고, 발행 겸 편집인은 장효근(張孝根)이 맡았으나 4개월 뒤에 사임하고 후임 총무로 최영목(崔榮穆)이 임명되었다.
그 밖에도 윤효정(尹孝定)·심의성(沈宜性) 등이 재정적인 후원을 하였고 이종린(李鍾麟) 등이 기자로 활약하였다. 처음 자본금도 없이 광고료 50원을 가지고 출발하여 자체 인쇄시설을 갖추지 못하고 흥사단(興士團) 소속의 동문관(同文館) 인쇄소에서 발행하였다.
국한문혼용으로 편집체재는 배대판(倍大版), 4면 6단제(1단 45행)로 4호 활자를 사용하였으나 그 뒤 7단제로 바뀌었다. 민족의 사상을 통일하여 민족의 단결을 꾀하는 동시에, 동포를 지도·계발하기 위한 지식의 보급을 그 사명으로 내걸었던 이 신문은 창간호부터 제1면에 이도영(李道榮)의 목판 시사만화를 연재하여 일본인들의 비행을 풍자·경고하여 인기를 끌었다. 이것은 우리 나라 최초의 신문 연재만화였다.
특히, 1909년 9월 2일자에서는 이완용내각(李完用內閣) 때 <군대해산령 軍隊解散令>이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해산령에 날인한 군부대신 이병식(李秉式)은 여전히 군복을 착용하고 다녔으므로 ‘벌거벗고 환도찼군’이라고 설명을 붙인, 나체상에 칼만을 차고 군대식 경례를 하고 있는 그림을 묘사하여 친일관료를 야유하였다.
또, 1910년 6월 5일자부터 순한글로 된 <금수재판 禽獸裁判>이라는 풍자소설을 연재하여 많은 독자들의 주목을 끌었으며, 단편소설에 삽화를 넣어 신문삽화의 길을 열었다.
국권수호를 위하여 주로 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비판하는 내용의 논설과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와 국시유세단(國是遊說團)에 대항하는 항일투쟁적인 논진을 폈으며,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지 3년 뒤에 발간된 신문이지만 다른 민족지의 논조를 이어받아 국채보상운동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보도하였다.
또한, 항일독립운동과 애국사상 앙양에 크게 영향을 끼쳤던 안중근(安重根)의거에 관하여 상세하게 보도하여 애국사상을 고취하였다. 1909년 12월 4일 일진회가 발표한 이른바 경술국치성명서에 대하여 이를 통렬히 비난하고 규탄하는 논조를 폈다.
8월 하순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자 1910년 8월 30일자(제356호)부터는 ‘대한(大韓)’이라는 글자를 떼어내고 ‘민보(民報)’라는 제호로 다음날 31일자 제357호를 내고 폐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