괘서는 비방이나 민심 선동을 위하여 공공장소에 몰래 붙이는 게시물이다. 벽서라고도 한다. 개인 사이의 사적인 고발에서부터 당파나 나라를 비방하고 민심을 동요시키기 위한 것까지 각종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대부분 작성자의 이름을 숨겼기 때문에 익명서로 간주했다. 수많은 사화·옥사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법으로 엄격하게 금하였다. 조정에 대하여 불만과 불평을 가진 백성들에 의해서 민심의 선동 매체로 이용되었으며, 유언비어의 원천이 되었다. 대중매체가 없었던 시대에 정치적 현실을 널리 알리는 신문의 구실도 하였다.
벽서라고도 한다. 이름을 숨기고 은밀하게 남을 모함하기 위한 투서형식의 익명서도 공개된 장소에 게시한 것이면 이에 해당한다. 개인 사이의 사적인 고발에서부터 당파나 나라를 비방하고 민심을 동요시키기 위한 것까지 각종 목적으로 흔히 이용되었다. 예컨대, 묘지쟁송(墓地爭訟)에서 패소한 사람이 괘서로써 그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포악한 관원을 비난하거나, 때로는 지방관의 선정을 칭송하는 경우도 있었다.
괘서 · 벽서는 대부분 발표자의 이름을 숨겼으므로 이를 익명서로 간주하였으며, 주로 남을 모함하고 무고(誣告)하는 데 사용되어 수많은 옥사 · 사화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이를 법으로 엄격하게 금하였다. 1395년(태조 4) 서적원(書籍院)에서 간행한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를 보면, 익명서를 투입한 자는 교형(絞刑)에 처하고 이를 발견한 자는 즉시 소각해야 하며 만일 관가에 내놓는 자는 장(杖) 80, 관가에서 수리한 자는 장 1백의 형에 처하고 피고는 처벌하지 아니하며 이를 체포하여 알리는 자에게는 은 10냥을 지급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를 보고 소각하지 아니한 사람과 그 내용을 전파한 자에 대한 처벌규정은 『대명률직해』에 명시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1679년(숙종 5)에는 괘서가 붙어 있는 집에서 이를 보고도 즉시 소각을 않은 자와 그 내용을 전파하는 자는 전가족을 국경지방으로 강제로 이주시키는 형벌을 추가하였다.
괘서사건은 역대왕조를 통하여 엄격한 규제를 시행하였으나 빈번하게 일어났다. 예컨대, 888년(진성여왕 2)에 익명으로 시정(時政)을 비방하는 방(榜)을 큰길에 게시한 사건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도 1298년(충렬왕 24)에 어떤 사람이 궁궐문에 괘서를 붙인 큰 사건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 조인규(趙仁規)의 아내가 귀신과 무당을 섬기며 공주를 저주, 왕으로 하여금 공주를 사랑하지 않고 자기 딸에게만 사랑을 쏟게 하였다.”로 되어 있어 공주가 조인규와 그 아내를 옥에 가두었는데, 범인을 잡고 보니 사재주부(司宰注簿) 윤언주(尹彦周)였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벽서변(壁書變)’이라고 불린 괘서사건이 적지않게 발생하였다. 예컨대, 1547년(명종 2)에 경기 광주의 양재역에서 그 당시 권세가 당당한 윤 대비와 이기(李芑)를 비방하는 벽서사건이 발생, 이른바 정미사화를 일으켰다. 즉, 이 해(丁未年) 9월 “여자 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력을 농락하고 있으니, 나라가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리는 격이다. 어찌 한심하지 아니하리오……”라는 내용의 붉은 글씨로 쓴 괘서가 양재역에 붙자 세도가들이 크게 분노하게 되었고, 그것은 곧 붕당싸움에 이용되어 무고한 사람까지 희생시키는 정미사화를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1604년(선조 37)에도 당시의 재상과 환관 · 궁녀의 성명 및 그들의 음란한 일들을 매우 흉악하게 열거해놓은 괘서가 문묘에서 발견되자, 그 혐의자로 정언선(鄭彦璿) 등 4, 5인의 유생들이 붙잡혀서 곤혹을 치르게 되었으나, “불명한 죄상으로 유생을 고문할 수 없다. ”라는 선조의 현명한 판단으로 유생들은 난을 면하였다.
‘괘서’라는 명칭은 특히, 조선 중엽 이후의 문헌에 자주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삼정(三政)이 문란하고 세도정치가 극심하자 이에 시달린 백성들이 괘서를 이용하여 나라를 비방하고 민심을 선동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1728년(영조 4) 1월, 민심을 소란케 하는 내용의 괘서가 서울의 서소문에 붙어 조정을 놀라게 하였는데, 이와 똑같은 괘서가 이미 그 한 달 전에 전라도 전주와 남원에도 붙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괘서는 사회의 불안 조성에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으므로 조정에서는 괘서의 범인을 잡는 자에게 상으로 천금을 내리고 2품 벼슬도 내리겠다는 정령을 포고할 정도로 괘서 규제를 강화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괘서는 근절되지 않았던 듯, 1755년(영조 31)에도 소론(少論)의 윤지(尹志)에 의한 큰 괘서사건이 일어났다. 윤지는 숙종 때 과거에 급제, 1724년 김일경(金一鏡)의 옥사에 연좌되어 아버지는 고문을 받아 죽고, 자신은 30여 년 동안 귀양살이를 한 것에 불만을 품고 동지를 규합, 거사를 하기 이전에 민심을 자극하기 위해 나라를 비방하는 글을 나주 객사에 붙였다가 발각되어 처형을 당하였으며, 소론은 완전히 제거되고 말았다.
그 뒤에도 괘서사건이 계속 나타났는데, 예컨대 1783년(정조 7)에는 대신들이 출입하는 궁문인 금호문(金虎門)에 가평군수의 불법처사를 비방하는 괘서사건이 있었다. 1789년에도 서울 돈화문의 서협문(西夾門)에 한글로 된 괘서가 문밖 서쪽 기둥에 붙어 있었는데, 그 내용은 낭천현감 정내백(鄭來百)이 민정을 돌보지 아니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정조에게 보고되자 국왕은 차후로 이와 같은 문서는 수문장 또는 순검들이 발견하는 대로 즉시 불에 던져버리고 절대로 알리지 말 것을 지시, 익명서나 괘서로 인한 무고한 옥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시켰다.
괘서사건은 순조 이후에도 전국 각지에서 더욱 빈번하게 나타났는데, 농민들의 불만과 불평이 음성적인 형태로 표출된 이러한 괘서사건이 연달아 일어나자 민심이 소란하게 되었다. 1801년(순조 1)에는 의령에 사는 전지효(田志孝)가 그의 매형을 시켜서 하동과 창원에 차례로 흉서를 붙이게 하여 민심을 선동하고 현혹시켰다. 1804년에는 상민인 재영(載榮) · 성서(性西) 등이 결탁하여 ‘관서비기(關西秘記)’라는 괘서를 서울의 도성 4문에 써붙여 민심을 크게 선동한 일이 있었다.
1819년에는 화성에서도 괘흉서사건(掛凶書事件)이 일어났는데, 이는 김노신(金魯信)이 광양의 부자 강창일(姜昌一)과 그의 아들로부터 장차 돈을 빌려서 선박 4, 5척을 구득하고 병기를 제조, 해상에서 병란을 일으킬 흉계를 꾸미고 있는데 김노신이 도원수가 되어 80명의 제장과 10만의 대병을 동원한다는 내용이었다. 1826년에도 청주에서 조정을 비방하는 괘서가 나붙었는데, 그 내용이 몹시 불온한 것이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그 책임을 물어 청주목을 서원현으로 강등시키기까지 하였다.
한말에도 괘서가 자주 이용되었는데,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자 독립협회에 비하여 수세에 몰린 수구파는 개화파를 모략하기 위하여 “이씨 왕조가 쇠망하여 만민이 공동으로 윤치호(尹致昊)를 대통령으로 추대하게 될 것이며 정부와 서민이 모두 이에 승복하고 있다.”는 내용의 괘서 또는 익명서를 작성하여 서울 곳곳에 붙여 놓았는데, 이를 믿게 된 고종은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을 구속하는 한편, 독립협회 해산령까지 내리게 되었다.
이와 같이 괘서는 조정에 대하여 불만과 불평을 가진 백성들에 의해서 민심의 선동매체로서 꾸준히 이용되어 왔으며 또한 유언비어의 원천이 되었다. 한편, 괘서는 대중매체가 없었던 시대에 많은 사람들에게 정치적 현실을 널리 알리는 신문의 구실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