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사심(士心). 할아버지는 윤천뢰(尹天賚)이고, 아버지는 판서 윤취상(尹就商)이다. 어머니는 한우굉(韓宇宏)의 딸이다.
1705년(숙종 31) 진사시를 거쳐 1723년(경종 3)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사간원정언에 제수되고, 이어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1724년(영조 즉위년) 김일경(金一鏡) 등의 옥사에 연좌되어 소론파의 영수였던 아버지는 고문 끝에 죽고, 윤지는 이듬해 6월 제주도 대정현에 안치되었다.
19년 만인 1743년 나주로 감등이배(減等移配)되었다가 같은 해 전리(田里)에 방축되었다. 제주와 나주에서 30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하였지만 김일경 일파의 역도로 낙인이 찍혀 등용될 가망이 없었으므로, 나주목사 이하징(李夏徵)을 비롯하여 이효식(李孝植) 등 계조직을 가진 동지들과 더불어 늘 조정에 불만을 품어왔다.
1755년 1월 노론파를 지목하여 나주객사에 나라를 비방하는 괘서를 붙였다. 이른바 을해옥사로 일컬어지는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서울로 압송되고, 친국 끝에 그해 2월 아들 윤광철(尹光哲) 그리고 이하징·박찬신(朴纘新) 등 관련자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 사건으로 소론파 중 준소(峻少)계열은 완전히 타도되고 몰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