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사심(士心)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88년(숙종 14)
사망 연도
1755년(영조 31)
본관
함안(咸安)
주요 관직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관련 사건
을해옥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사심(士心). 할아버지는 윤천뢰(尹天賚)이고, 아버지는 판서 윤취상(尹就商)이다. 어머니는 한우굉(韓宇宏)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05년(숙종 31) 진사시를 거쳐 1723년(경종 3)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사간원정언에 제수되고, 이어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1724년(영조 즉위년) 김일경(金一鏡) 등의 옥사에 연좌되어 소론파의 영수였던 아버지는 고문 끝에 죽고, 윤지는 이듬해 6월 제주도 대정현에 안치되었다.

19년 만인 1743년 나주로 감등이배(減等移配)되었다가 같은 해 전리(田里)에 방축되었다. 제주와 나주에서 30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하였지만 김일경 일파의 역도로 낙인이 찍혀 등용될 가망이 없었으므로, 나주목사 이하징(李夏徵)을 비롯하여 이효식(李孝植) 등 계조직을 가진 동지들과 더불어 늘 조정에 불만을 품어왔다.

1755년 1월 노론파를 지목하여 나주객사에 나라를 비방하는 괘서를 붙였다. 이른바 을해옥사로 일컬어지는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서울로 압송되고, 친국 끝에 그해 2월 아들 윤광철(尹光哲) 그리고 이하징·박찬신(朴纘新) 등 관련자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 사건으로 소론파 중 준소(峻少)계열은 완전히 타도되고 몰락하였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천의소감(闡義昭鑑)』(김재노)
『약파만록(藥坡漫錄)』(이희령)
『조야집요(朝野輯要)』
『국조방목(國朝榜目)』
『사마방목(司馬榜目)』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