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10월 19일 천주교에서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서울에서 발간한 순한글판 주간신문이다. 발행인 겸 주필은 프랑스인 신부 안세화(安世華, Florian Demange)였다. 외국인을 발행인으로 한 것은 외국인의 치외법권적 지위를 이용하여 통감부(統監府)의 언론탄압을 피하고자 한 방편이었다.
창간사를 통하여 『경향신문』이라는 제호는, 서울백성뿐만 아니라 시골백성에게도 배포하여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다는 의도 아래 명명된 것이라 하고, 공정한 보도와 지식의 보급을 그 신문의 사명이라고 밝혔다. 초기에는 타블로이드판 4면과 부록으로 국판 크기의 8면 보감(寶鑑)을 발행하였으며, 이듬해 10월 18일 제53호부터는 판형을 바꾸어 오늘날의 신문 크기와 비슷하게 발행되었다.
제1면에 주로 일일특보(日日特報)라 하여 국내의 주요 기사 및 시사문제에 관한 논설과 국내외 소식, 문예작품, 계몽적인 기획물들이 실렸고, 부록인 보감은 시사성을 띤 신문기사와는 다른 성격의 교리적인 논설, 한국천주교교회사, 중요한 법률해설 등으로 꾸며졌다.
기사나 논설은 독자들로부터 비교적 좋은 평을 받았으며, 논설은 당시 대표적인 일간신문이었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전재되기까지 하였다.
취재와 편집에 절대적인 기여를 한 사람은 1882년 말레이시아(Malaysia)페낭(Penang)의 신학교에 유학하였던 한국인 신부 김원영(金元永)으로서, 『경향신문』이 창간되자 신문의 편집과 실무를 맡았다. 지방소식은 주로 전국 각처에서 활동하는 신부들이 제공하였으며, 보급에 있어서도 교회당국이 지원하여 독자를 확보하였다. 1907년도 기록에 의하면 4,200명의 정기구독자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1910년 4월 22일자 제184호가 「신문지법」에 의하여 치안방해라 하여 발매금지 및 압수를 당하기도 하였다. 1910년 국권을 탈취당하자 폐간의 위협을 받게 되었으며, 그 해 12월 30일 종간호(제220호)를 내고 제221호부터는 『경향잡지(京鄕雜誌)』라 개제하여 월 2회 발간의 잡지로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