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7월 28일 경상북도 봉화에서 출생하였다. 1세에 부친의 별세로 서울에서 잠시 있다가 만주 봉천으로 망명하였다. 3년 뒤 귀국하여 서울에서 할아버지의 교육을 받았다. 독립운동가 집안의 딸로 민족의식이 높았고, 자부심도 강하였다. 동덕여고보를 나와 교원, 간호부 생활도 잠깐 하였지만 공장에 취업, 노동운동을 하였다. 박두복과 결혼하여 울산에서 생활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남편이 월북하고는 좌익으로 몰려 오랫동안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2010년 8월 14일 사망하였다.
동덕여고보에 입학한 후 한글학자 이윤재(李允宰)의 민족주의에 공감하였으며, 5촌 아저씨 이병기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에 입문하였다. 3학년 때 이평산의 경성RS협의회의 독서회에 가입, 활동하였다. 박진홍(朴鎭洪), 이순금(李順今) 등과 ‘백지동맹’을 주동, 시험을 거부하여 무기정학을 받았다. 광주학생운동에 동조, 시위에 참가하여 종로경찰서에 잡혀가기도 하였다.
1933년 이재유(李載裕) 그룹과 연결되어 노동자 의식화운동을 하였다. 같은 해 9월 21일 종연방직 경성제사공장 파업 때 지원활동을 하다 10월 17일 동대문경찰서에 보름간 구금되었다. 또한 1934년 권영태 그룹의 ‘적색노조사건’에 연루,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었으나 면소 처분을 받았다. 1935년 동덕여고보에 숨어들어가 항일격문 등으로 학생들을 독려하는 활동을 하다 여러 번 체포, 고문을 당하였다. 울산적색노동조합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었으며, 1935년 11월 서울에서 이재유 · 권우성(權又成) 등이 주도 조직한 ‘경성지방좌익노동조합 조직준비회’에 가담하여 동지 규합과 항일의식 고취에 주력하다가 재차 검거되어 약 13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70세에 『회상』(경남, 1989), 80세에 『여든을 살면서』(경남, 1995) 등의 시집을 발간, 자신의 문학적 재능도 한껏 발휘하였다.
93세인 2006년에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