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1월 14일 서울의 양반가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이경식(李京植)으로, 장진홍(張鎭弘) 의사의 대구 조선은행 폭탄투척의거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바 있다. 큰아버지 이원식 등은 안동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하였다. 이병희는 중국을 오가며 운동에 투신한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자랐다. 일경의 감시 속에 어머니는 말도 잘 못하는 우울증에 걸렸고, 이병희가 옥중에 있을 때 별세하였다. 이병희는 15세에 동덕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여자상업학교(서울여자상업학교 전신)에 1년간 다니다 중퇴하였다. 아버지의 민족의식을 이어받은 이병희는 항일노동운동을 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27세인 1944년에 토목 기술자 조인찬과 혼인하여 몽골 탄광 등지에서 생활하였다. 해방 후 귀국하여 신의주 시가에서 살다가 남편과 함께 월남하였다. 아들과 수양 딸 한 명과 서울에서 살다가 2012년에 별세하였다. 질녀 이효정(李孝貞)도 일제강점기 당시 항일노동운동을 하였다.
1933년 5월 서울의 종연방적주식회사(鍾淵紡績株式會社)에 여공으로 취업하였다. 1936년 회사에서 동료 김희성(金熙星), 박인선(朴仁善) 등과 여성동지들을 규합하여 노동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39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2년 4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 출옥하였으나 요시찰인물로 지목되었다. 이후에도 삿뽀로 맥주, 기린 맥주회사, 영등포 방직공장 등에서 노동운동을 하여 여러번 체포, 고문을 받았다.
1940년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동지 박시목(朴時穆), 박봉필(朴鳳弼) 등에게 문서를 전달하는 연락책 역할과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1943년 이육사(李陸史)와 같이 독립운동을 도모하다 9월에 체포되어 베이징 감옥에 함께 구금되었다. 1944년 1월 11일 결혼을 조건으로 석방되었으나, 1월 16일 이육사가 감옥에서 순국하자 그의 시신을 화장하고, 유품인 「광야」, 「청포도」 등 시 작품을 정리하여 국내의 유족에게 전달하는 중책을 맡아 수행하였다.
1996년(79세)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