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은 김재한(金載漢)·김의환(金毅煥). 서울 출신. 아버지는 조선민족대동단 총재를 지낸 김가진(金嘉鎭)이다. 부인은 여성독립운동가 정정화이다.
1919년 10월 국내에서 비밀결사인 대동단(大同團)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아버지 김가진(金嘉鎭)과 함께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1928년 6월상하이에 있던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中國本部韓人靑年同盟)의 상해지부 조직에 참가해 재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4월 윤봉길(尹奉吉)의 훙커우공원[虹口公園] 폭탄의거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그 해 5월 초 상하이에서 항저우[杭州]로 이전을 하였다. 이 때 임시정부 요인 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 등을 모시고 저장성[浙江省]자싱[嘉興]으로 피신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에 참가하였다.
1934년 1월 이동녕·김구·안공근(安恭根) 등과 함께 애국단(愛國團)을 조직하고 그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뤄양군관학교분교[洛陽軍官學校分校] 내의 한인군관학교와 의열단(義烈團) 계열의 군관학교에도 관여하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39년 10월 대한민국임시정부 비서처(秘書處) 비서, 선전위원회 선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충칭방송국[重慶放送局]을 통해 국내에 있는 한국인들이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0년 5월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창립되자 감찰위원회 위원과 상무위원 겸 조직부 주임을 맡았다.
그 해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전, 정착한 뒤 중국 국민당(國民黨) 정부가 광복군(光復軍) 활동을 정식으로 동의한 뒤 광복군총사령부 주계(主計)에 선임되었다. 1943년 8월부터 광복군 조직훈련과장을 맡아 활동하였고, 1945년 6월에는 정훈처(政訓處) 선전과장으로 광복군 활동에 참가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