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동래 출신으로, 일제 식민체제에 강한 저항의식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 박용한과 신간회에서 활동한 오빠 박문희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강한 민족의식을 형성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1924년 조선소녀동맹 동래지부에서 활동하였다.
동래여고의 전신인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 재학시절, 수차례 항일학생운동을 주도하여 그때마다 거듭해 감옥살이를 하였고, 이때 일신여학교의 교지인 『일신』 2집에 발표한 「철야(徹夜)」라는 소설은 이 시기 박차정의 항일의식을 잘 나타낸 글로 호평을 받았다. 사회에 진출하자 동래청년회 부녀부장을 2년 동안 지낸 뒤, 1927년 근우회(槿友會) 동래지회 결성에 참여하고 민족독립에 관한 글을 발표하여 독립의지를 표출하였다.
이후 상경하여 여성의 좌우합작 민족운동단체인 근우회에 참여하면서 지도층으로 부상하였다. 1929년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선전조직과 출판부문을 담당하였고, 1930년 1월, 서울의 11개 여자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광주학생운동 때의 막후활동 관련자로 일경에 체포된 후, 서대문형무소에서 3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1930년 중국에 망명하여 북경 화북대학(華北大學)을 졸업하고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레닌주의 정치학교의 운영에도 참여하였고, 1931년 의열단을 주도하는 김원봉(金元鳳)과 결혼했다.
1932년에는 남경으로 옮겨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여자부 교관으로 교양교육과 훈련을 담당하였고, 1935년 민족혁명당의 지원단체인 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하여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하였다.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 창설에 관여하고 1938년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으로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여성의 몸으로 일제와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그는 1939년 강서성 곤륜산(崑崙山)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였고, 이때의 후유증으로 1944년 35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