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시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상해한인청년동맹 부인부 책임, 중국공산당 한인지부 선전부 책임,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대 지휘관 등을 역임하며 사회주의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이칭
이칭
여장군, 백마 탄 여장군, 스베츠로바, 김희원(金喜元)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907년(순종 즉위)
사망 연도
1949년 10월 10일
본관
김녕(金寧)
출생지
경상남도 마산
관련 사건
조선공산당 재건사건| 중국공산당 상해한인지부 역원사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김명시는 일제강점기 상해한인청년동맹 부인부 책임, 중국공산당 한인지부 선전부 책임,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대 지휘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7년(순종 1)에 태어나 1949년에 사망했다. 1924년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25년 고려공산청년회의 모스크바 청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였다가 중퇴하고 상해로 가서 사회주의운동에 투신하였다. 1932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으로 체포되어 만기 출옥한 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때에 ‘여장군’ 또는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렸다고 한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상해한인청년동맹 부인부 책임, 중국공산당 한인지부 선전부 책임,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대 지휘관 등을 역임하며 사회주의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개설

김명시(金命時)는 일제강점기 중국공산당 및 조선의용대에서 활약하고, 해방 후 좌익부녀운동에 참여한 사회주의계열의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김녕(金寧)이며, 1907년 경상남도 마산부 만정(萬町, 지금의 마산시 동성동) 189번지에서 출생하였다. 스베츠로바, 김희원(金喜元)이라는 이름도 사용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민족의식이 투철한 어머니 슬하에서 2남 2녀 중 둘째로 성장하였으며, 오빠 김형선(金炯善)은 마산 사회주의운동의 맹주로 알려져 있다.

생애

1924년 3월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하여 배화고등보통여학교에 입학했으나 학비조달이 여의치 않아 중퇴하였다. 1925년 10월에 소련으로 유학,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 입학했으나 1927년에 중퇴하고 상하이〔上海〕로 가서 사회주의운동에 뛰어들었다. 해방 후 서울로 돌아와 좌익여성운동에 참여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후 좌익계 숙청 광풍이 일어났을 때 체포되었다. 1949년 10월 10일 오전 5시 50분경에 자기의 상의를 찢어서 유치장 내 약 3척 높이 되는 수도관에 목을 매고 자살한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그의 죽음이 알려졌다.

활동사항

1925년 7월 오빠 김형선이 가입해 활동하였던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들어가 마산 제1야체이카에 배속되었다. 그 해 10월 고려공산청년회의 모스크바 청년유학생으로 뽑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27년 6월 공산대학을 중퇴하고 상하이로 와서 중국공산청년단 상해한인지부에 가입하고 조직부 겸 선전부의 책임과 지부 책임직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 해 9월에는 상해한인청년동맹에 가입하여 부인부(婦人部) 책임에 취임하였다.

1928년 6월에 타이완, 필리핀, 베트남, 인도 등 각국 식민지 민족과 중국인 운동가 300여명과 협의하여 동방피압박민족반제자동맹주비회(東方被壓迫民族反帝者同盟籌備會)를 조직하고 위원으로서 활동하였다. 1929년 10월경에는 홍남표와 함께 만주의 길림성 아성현(阿城縣) 이중전자(二層甸子)로 가서 코민테른의 일국일당(一國一黨) 지침에 따라 한국인 당원들을 중국공산당에 가입시켰다. 재만조선인반일본제국주의대동맹(在滿朝鮮人反日本帝國主義大同盟)을 조직,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출판계(出版係)를 담당해 기관지인 『반일전선(反日戰線)』을 제작하였다.

1930년 5월 이립삼(李立三)의 좌경주의노선에 따라 5월 30일 자정에 300여명의 한인 무장대가 하얼빈 시내의 기차역과 경찰서, 일본영사관을 공격해 큰 타격을 주었다. 김명시는 홍남표와 함께 상하이로 돌아와 중국공산당 한인지부로 전속되어 선전부 책임을 맡아 활동하였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제국주의 타도와 한국 독립을 목적으로 상해한인반제동맹(上海韓人反帝同盟)을 조직하였다.

1932년 3월에 중국공산당 본부의 지령을 받아 선전지 『꼬뮤니스트』 원고를 가지고 서울로 잠입하였다. 인천에 거처를 마련하고 각종 전단과 함께 등사하여 비밀리에 배포하였고 인천지역 공장의 여성노동자들을 교육하였다. 그러나 몇 달 후 조선공산당 재건 조직운동이 발각되어 1932년 5월 신의주에서 체포,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1933년 12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년을 언도받고 1939년 신의주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하였다.

1939년 재차 중국으로 탈출하여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들어가 부녀복무대의 지휘관으로 적후 공작을 전개하였고 옌안〔延安〕으로 이동하였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편한 이후 텐진〔天津〕과 베이징〔北京〕 등 일본 점령 지구에 파견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때 김명시는 ‘여장군’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렸다.

1945년 12월에 귀국하여 화북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현황을 언론에 알렸다. 12월 22일에 개최된 조선부녀총동맹(朝鮮婦女總同盟) 결성대회에 참가하여 국내외 여성운동의 실상을 알리고 조선부녀총동맹의 선전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7년 6월 전라도에서 발생한 우익테러사건과 관련해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의 조사단원의 일원으로 활약했으며 민주여성동맹 대표로 미군정청을 방문하여 미군정 사령관 하지(John Reed Hodge) 중장에게 반탁시위항의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상훈과 추모

2022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남로당연구』 3-자료편(김남식 편저, 돌베개, 1984)
『한국공산주의운동사』-자료Ⅰ·Ⅱ-(김준엽·김창순공편,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1979·1980)
『매일신보(每日申報)』(1933.2.25; 1933.11.15; 1933.12.14)
『동아일보(東亞日報)』(1932.8.29; 1933.9.26; 1945.12.23; 1949.10.11)
「중국 공산당 상해 한인지부 역원(役員) 事件」(『사상월보(思想月報)』 3-11, 고등법원검사국사상부(高等法院檢事局思想部), 1934. 2.15)
「일군하(日軍下)에 비밀활약, 독립동맹(獨立同盟)의 여장군 김명시여사담(談)」(『중앙신문』 1945.12.22)
「여류혁명가를 찾아서 ⑦ 20년간 투쟁생활, 胎中에도 감옥살이, 김명시 여사편」(『독립신보』 1946.11.21.)
「팔로군에 종군했던 김명시여장군의 반생기」(노천명,『신천지』 1946년 3월호)
『자유신문』(1945.12.27; 1949.10.11)
『경향신문』(1949.10.14)
『조선의용군의 독립운동』(염인호, 나남, 2001)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엮음, 창작과비평사, 1996)
「20. 여장군, 또는 혁명의 화신-항일무장투쟁의 최전선에서 싸운 투사 김명시」(정운현, 『조선의 딸, 총을 들다』, 인문서원, 2016)
「김명시 만주벌판 주름잡던 ‘백마 탄 여장군’」(김성동, 『현대사 아리랑-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녹색평론사, 2010)
집필자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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