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일제강점기 고려공산청년동맹 간도총국 조직부 책임자, 화북조선독립동맹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만주 지역의 사회주의운동 역량을 통일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용정(龍井)의 동흥중학교에 사회과학연구회의를 조직하였다. 1923년 박윤세(朴允世) 등과 고려공산청년동맹 간도총국을 결성하고, 1924년 12월 조직부 책임자가 되어 이 조직을 고려공산청년동맹 만주총국으로 확대, 재편시켰다.
1925년 9월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조선공산당의 파벌을 청산하고 당을 통일하기 위해 최창익(崔昌益)과 함께 국내에 들어와 서울파 공청(共靑)의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다. 1926년 3월 양명(梁明) 등 10여 명의 동지들과 ‘제3차 조선공산당’의 모태가 되는 레닌주의동맹을 결성하였다.
1928년 양명과 함께 모스크바에 있던 중,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공산당 해산방침을 전달받고 1929년 5월 하순 지린[吉林]에서 ML파 동지들과 함께 조선공산당재조직 중앙간부를 조직,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연락임무를 담당하였다.
1930년 2월 초순경 한해(韓海)의 죽음과 고광수(高光洙)의 체포소식을 듣고 국내에 들어왔다. 3월 부산경찰서에 붙잡혀 6년 동안 복역하였다. 1936년 출감한 뒤 허정숙(許貞淑)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 난징[南京]에서 김원봉(金元鳳)이 주도하던 조선민족혁명당에 참가하였다.
이후 청년층의 지지기반을 확보하는 활동을 전개하여 조선청년전위동맹 등을 결성하였다. 1940년 최창익이 북상을 요구하자 이에 동의하고 중국공산당의 근거지인 타이항산[太行山]으로 들어갔다.
1941년 8월부터 무정(武亭)이 설립한 조선의용대간부훈련반의 교사로 활동했고, 1942년 1월부터는 화북조선청년학교에서 정치경제학과 세계공산주의운동사의 강의를 담당하였다. 그 해 7월 반일민족통일전선조직인 화북조선독립동맹이 결성되자 중앙집행위원 및 부주석으로 활동하였다.
광복이 되자 1945년 12월 평양으로 들어갔다가 남한에서 조선독립동맹 조직기반을 강화하고자 1946년 1월 조선독립동맹 부위원장으로 서울에 왔다. 그 후 김명시(金明時)와 함께 순회강연 등에 주력하는 한편, 조선독립동맹 경성특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또한, 2월에는 북한에서 조선독립동맹이 조선신민당으로 개편되자 부위원장이 되었다. 경력에 비해 고급 당간부나 위원이 되지 못하고, 1956년 ‘연안파 숙청’ 때 국립도서관 관장으로 좌천되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 『한국공산주의운동사』1-5(김준엽·김창순, 청계연구소, 1986)
- 『現代史資料』29(姜德相 編, みすず書房,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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