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해방과 함께 여운형(呂運亨)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같은 해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자, 송진우 등 민족주의자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며 환국을 기다려야 한다는 임정봉대론을 주장하며 이에 대립하였다.
사상적으로 좌·우의 중도노선에 있던 여운형은 우익진영의 협력을 잃게되었고,공산주의자들은 같은 해 9월 11일 조선공산당을 결성하였다. 한편, 민족주의자들은 같은 달 16일, 한국민주당을 결성하였고, 10월 10일에는 아놀드(Arnold,A.V.) 미군정 장관이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인하는 성명을 냈으며,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주석에 추대되었던 이승만(李承晩)은 11월 7일 주석 취임을 거절한다는 성명을 냈다.
여운형은 11월 12일 그의 직계세력이던 건국동맹을 주축으로, 고려국민동맹·인민동지회·일오회 등 군소정파를 규합하여 조선인민당을 창당하였다. 위원장은 여운형, 부위원장에는 장건상(張建相)이 선임되었으며, 서기장 이만규(李萬珪), 사무국장 이임수(李林洙), 정치국장 이여성(李如星), 조직국장 김세용(金世鎔), 선전국장 김오성(金午星), 기획국장 송을수(宋乙洙) 등의 인사를 단행하였다.
당의 강령은 ① 조선민족의 총역량을 결집하여 진정한 민주주의국가의 건설을 기함, ② 계획경제제도를 확립하여 전민족의 완전광복을 기함, ③ 진보적 민족문화를 건설하고 전 인류의 문화 향상에 공헌을 기함이라는 3개 항이다.
이 강령을 구현하기 위하여 30개 항의 정책을 채택하였는데, 대체로 조선공산당과 노선을 같이하였다. 여운형은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를 정당으로 개편하기위해 미군정청의 집회 허가를 얻어 11월 20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열었다. 700여 명이 모인 이 대회는 중앙인민위원회의 보강을 위하여 여운형·허헌·최용달·이승엽·홍남표·이기석·이여성·조두원·안기성·홍덕유·이상훈·정백 등 12명으로 구성된 전형위원만을 선출하였다.
1946년 여름 남조선신민당과 조선공산당 및 조선인민당의 3당 합당운동이 일어나자 당내 찬반 대립으로 심한 갈등이 일어났으며, 결국 남조선노동당의 결성으로 기울어졌다. 이 와중에 여운형은 11월 12일, 자파세력을 중심으로 따로 사회노동당을 조직함으로써 조선인민당은 창당 1년 만에 해체되었다.
그러나 사회노동당은 북조선노동당과 남조선노동당으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고 1947년 2월 27일 스스로 해체하였다. 이즈음 여운형은 조선인민당재건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동조세력들을 모아 5월 24일 근로인민당을 결성하였는데, 당의 강령·정책이 조선인민당과 상당히 유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