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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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인정식 전후면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인정식 전후면
산업
인물
해방 이후 『조선의 토지문제 』 · 『조선농업경제론』 등을 저술한 학자. 농업경제학자 · 언론인 ·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김영호(金永浩), 김수삼(金水蔘), 김광수(金光洙), 桐生一雄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7년 3월 17일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평안남도 용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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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해방 이후 『조선의 토지문제 』 · 『조선농업경제론』 등을 저술한 학자. 농업경제학자 · 언론인 · 친일반민족행위자.
생애 및 활동사항

1907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출생했다. 조부가 개설한 시열재(時說齋)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광량만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21년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25년 일본에 건너가 호세이(法政)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나, 졸업 직전 자퇴했다. 1927년 9월 이우적의 권유에 의해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에 가입했고, 1928년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위원 및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책임비서로 활동했다.

1929년 귀국 후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31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았다. 1934년 11월 가출옥한 후 고향에 돌아가 야학을 개설해 활동하다가 1935년 여름 상경하여 조선중앙일보 논설위원으로 입사했다. 이후 『조선중앙일보』, 『비판』 등의 신문과 잡지에 다수의 평론을 발표했다. 1938년 인정식에게 영향을 받은 고향 청년들이 조직한 공화계야학사건의 주모자로 검거되어 같은해 말 사상전향을 선언하면서 석방되었다. 1939년 동양지광사에 입사하여 편집주임이 되었으며, 1940년에는 사상전향자 단체인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의 간사, 대동민우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해방 후 1945년 12월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 중앙위원이 되었고, 조선사회과학연구소, 조선과학자동맹, 민주주의민족전선 등에 가입해 사회주의 활동을 전개했다. 1947년 동국대학교 경제학부에서 강의했으며, 1948년 9월 창간된 『농림신문』의 주필이 되었다. 1949년 1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었으나 전향해 석방되었다. 한국전쟁 중 서울시인민위원회 후보위원과 중앙위원을 지내다 월북하였다.

인정식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3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7∼41)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참고문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인정식전집』(인정식전집간행위원회, 한울아카데미, 1992)
「일제 식민지기 인정식의 전향론: 내선일체론을 통한 식민적 관계의 형성과 농업재편성론」(장용경, 『한국사론』49, 2003)
집필자
조성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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