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한 ()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최익한 전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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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인물
해방 이후 북한에서 조선인민공화국 간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이칭
이칭
창해(滄海)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7년
사망 연도
미상
본관
강릉
출생지
경상북도 울진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최익한은 해방 이후 북한에서 조선인민공화국 간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1897년 경북 울진 출생으로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항일운동에 가담하였고,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원으로 활약하였다.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서 유학 중 일월회와 조선공산당 일본부에서 활동했다.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투옥되어 7년간 복역 후 학문활동에 전념하였다. 해방 후 우익을 보다 넓게 포괄하려는 입장에서 민족주자연맹에 참여하였고, 1948년 월북한 후 학문연구에 몰두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학연구의 선구자로 대표적인 저술서로 『실학파와 정다산』이 있다.

정의
해방 이후 북한에서 조선인민공화국 간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개설

호는 창해(滄海). 1897년 경상북도 울진 출생. 일본 유학 중 일월회조선공산당 일본부에서 활동했다. 사회주의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이청원(李淸源)은 그의 사위이다. 귀국 후 조선공산당 조직부장을 지내다가 검거되었다. 광복 후에는 월북하여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 대의원 등을 지냈다.

생애 및 활동사항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우다가 15세 때 영남학파의 거유(巨儒)인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 들어가 5년 동안 수학하였다. 1917년 곽종석의 권유로 서울에 가서 신학문을 익혔다. 중동학교를 마친 뒤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문학을 배웠다. 이어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항일운동에 가담하였고,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원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8월 영주군에서 1,600원을 모금하여 보낸 사건으로 1921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감형되어 1924년 석방되었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를 다니면서 사회주의사상을 받아들였다. 당시 진보적인 사상단체인 고려공산청년동맹 · 일월회 · 재일본무산청년동맹 · 신흥과학연구회 등에 가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3차 조선공산당에 참여하여 일본부 조직부장을 맡았다(1927년 9월∼11월). 신간회 창립을 전후한 시기에는 방향전환론을 주장하는 ML당의 이론가로 활약하였다. 그 뒤 조선공산당 일본부 선전부장으로 있다가 1928년 2월에 잡혀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1932년 7월 대전형무소로 이송 도중 대전역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여 징역 1년이 추가되어 7년간 복역하였다. 1935년 12월 출옥한 뒤에는 서울로 옮겨왔다. 만주사변 이후 전시체제로 이행한 상황하에서는 공개적인 사회주의운동이 불가능하였으므로 학문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조선일보사 향토문화조사위원, 동아일보사 논설사원으로 활동하였고, 신문이 폐간된 뒤에는 『춘추』지에 글을 발표하였다. 광복 직후에는 ML계 인사들과 함께 조선공산당 서울시당부에 참여하는 것을 시작으로 활발한 정치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 조선인민공화국의 간부로 지명되었고, 조선공산당에 입당한 뒤(1945.9.) 박헌영(朴憲永) 일파의 노선에 반대하는 사회노동당(1946.11.) · 근로인민당(1947.5.) 창당에 관여하였다. 통일전선형성문제에서는 우익을 보다 넓게 포괄하려는 입장에 서서 우익정당과의 제휴를 모색하였고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언제나 사회주의운동 내에서 비주류에 속하였으며, 결국 1948년 남북협상을 계기로 월북하였다. 월북한 뒤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을 지냈지만, 정치적인 활동보다는 학문연구에 더욱 몰두한 것 같다. 『력사제문제』(1949∼1950) · 『력사과학』(1955) 등에 실학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는 한편, 김일성대학(金日成大學)에서 강의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뒤의 소식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편, 1925년 『동아일보』에 「허생의 실적」이라는 글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여유당전서를 독(讀)함」 등 많은 글들을 발표하였다. 특히, 정약용(丁若鏞) 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1930년대 국학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저서

광복 이후에는 그 전에 쓴 「재해와 구제의 사적 단편관」 · 「조선의 후생정책」 등을 기초로 『조선사회정책사』(1947)를 간행하였으며, 1955년에는 그의 대표적인 저술인 『실학파와 정다산』을 간행한 실학연구의 선구자였다.

참고문헌

『실학파와 정다산』(최익한, 청년사 영인, 1989)
『한국공산주의운동사』 1(스칼라피노·이정식, 한홍구 옮김, 돌베개, 1986)
『한국공산주의운동사(韓國共産主義運動史)』3(김준엽·김창순,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1973)
『정약용(丁若鏞)의 정치경제사상연구(政治經濟思想硏究)』(홍이섭, 한국연구도서관, 1959)
『조선사회정책사(朝鮮社會政策史)』(최익한, 박문출판사, 194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인물자료(http://www.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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