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안동 출신. 1919년 3·1운동 때 충청남도의 당진·예산 등지에서 선전부원으로 활약하였으며, 1921년 항일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들어가 군자금을 모집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1923년 2월 권정필(權正弼)·남영득(南英得) 및 동향출신의 유병하(柳丙夏) 등과 함께 의병투쟁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서울 내자동에 살던 부호 이인희(李麟熙)의 집을 찾아가 5,000원을 요구하며 3차례에 걸쳐 독립자금의 출연을 강요하던 중 3월 3일 잠복중이던 일본경찰에게 잡히고 말았다.
1923년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7년형을 선고받았다. 1931년 시국비방죄로 다시 1년간 복역하였다. 광복 후에는 이승만(李承晩)독재정권에 불만을 품고 1952년 김시현(金始顯)과 6·25기념식장에서 이승만대통령을 저격하였다.
그러나 권총의 불발로 실패하여 이듬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그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복역하던 중 1960년 4·19혁명으로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