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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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서울에 있었던 중등과정의 사립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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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중동학교는 1909년 서울에 있었던 중등과정의 사립학교이다. 1906년 4월 한어와 산술 두 과목을 가르치는 야학으로 설립되었다. 1909년 5월 사립학교령에 의하여 학부 지정으로 사립중동학교 설립 인가를 받았다. 1915년 9월에 백농 최규동이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중동학교의 설립 정신은 최규동의 호를 딴 '백농정신'이다. 백농의 의미는 백두산 아래 사는 백의민족을 교육한다는 뜻이다. 중동학교의 건학정신은 애국애족, 자주자립, 창조개척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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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09년 서울에 있었던 중등과정의 사립학교.
연원 및 변천

중동학교는 1906년 4월 관립 한성한어학교(漢城漢語學校) 내에 교실 일부를 차용하여 당시 한어학교 교관이던 오규신(吳圭信), 유광렬(柳光烈), 김원배(金元培) 등 3인의 선생이 한어(漢語)와 산술 두 과목을 가르치는 야학으로 설립되었다.

이듬해인 1907년 1월 학부대신의 인준을 얻어 이 야학교를 중동야학교라 칭하고, 일어과목을 증설하고 오세창(吳世昌)이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후 1909년 5월 사립학교령(私立學校令)에 의하여 학부(學部) 지정으로 사립중동학교 설립인가를 받았다.

그러던 중 1914년 2월 학교의 차용지가 매각되어 학교가 폐교의 위기에 있을 때, 당시 설립자인 백농(白儂) 최규동(崔奎東)이 학교의 경영을 인수하여 현 위치인 수송동(壽松洞) 85번지에 사유가옥 일부를 차용하여 교사를 이전하고, 그 이듬해인 1915년 9월에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중동학교는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중동학교가 폐교의 위기에 있을 당시 경영을 인수하고 교장이 된 최규동은 재정의 어려움을 참아가면서 학교의 설비를 갖추고 민족정신을 학생들에게 고취시켜 후일 독립쟁취의 토대를 닦고, 자칫하면 좌절하기 쉬운 민족의식을 청소년들의 가슴속에 불어넣기 위하여 혼신을 다하고 피눈물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최규동은 서울 출생으로 어려서 사숙(私塾)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하다가 광신상업학교(廣信商業學校)를 거쳐 정리사(精理舍)를 졸업하고 정리사의 수학연구과를 마치었다.

그는 한국의 중등교육고등교육에 있어서 훌륭한 교육자이면서 또한 교육행정가였다. 그 후 그는 서울시교육회장 · 서울대학교이사장 · 서울대학교총장 등을 역임하였으나 6·25 한국전쟁 때 납치되어 평양에서 사망하였다.

중동학교의 설립정신은 최규동의 호를 딴 백농정신(白儂精神)이라고 할 수 있다. 백농정신은 백(白)자와 농(儂)자를 합친 의미가 있다. 즉 백자는 백두산과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는 데서 첫글자인 ‘백’자를 따왔으니 한국과 한국민족을 뜻한다. 그리고 ‘농’자는 인간을 농사짓는데 비유하여 인간을 기른다 혹은 키운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백농의 의미는 백두산 아래 사는 백의민족을 교육한다는 뜻이 있다.

이것은 중동학교의 건학정신이 우리 민족을 교육한다는 의지로 넘쳐있음을 나타내고 있는데, 백농정신을 구현하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내건 정신을 살펴보면 애국애족의 정신, 자주자립의 정신, 창조개척의 정신 등이다.

이것은 최규동이 중동학교의 설립이념으로 내세운 것으로 그후 오늘날까지 계승되어 왔다. 당시의 학교 교훈은 백농이 제정한 정직 · 근면 · 청결로 학교의 설립정신과 함께 지금까지 고수되고 있다.

중동학교의 교장으로는 초대가 오세창이었고, 그 뒤로 윤치소(尹致昭) · 신규식(申圭植) · 조동식(趙東植) · 최규동(崔奎東) 등이 지내다가 해방 이후 최규동이 국립 서울대학교 총장으로 피임됨에 따라 1950년 2월 조은택(趙殷澤)이 교장으로 취임하였고, 그 후로 이교선(李敎善), 방성희(方聖熙), 김덕환(金德煥) 등이 설립자의 설립정신 아래 학교를 이끌어 나갔다.

중동학교는 처음에 야학으로만 계속되어 오다가 1916년 4월 주학(晝學)을 병설하고, 1919년 1월 학교의 설립목적 · 명칭 · 학칙 등의 변경인가에 의하여 사립중동학교라 칭하고, 고등과 · 중등과 · 초등과로 나누어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22년 3월에 사립학교규칙 개정에 의하여 중동학교라 개칭하게 되었다.

이 당시에 최규동은 젊은이들의 교육을 위해 1주일에 50여 시간씩이나 혼신을 다해 가르쳤다. 그 후 해방으로 인하여 1945년 8월 중동학교를 중동중학교라 개칭하여 학교를 운영하다가 1948년 7월 재단법인 중동학원(中東學院)을 창설하고 최규동이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고, 이사에 최성장(崔性章), 조은택(趙殷澤), 홍만식(洪萬植)이 피임됨으로써 오늘날 중동학원의 모체가 확고하게 다져졌다.

1950년 6·25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학교는 폐문하고 부산으로 피난하여 1950년 10월 서면(西面)에 있는 임야를 차용하여 개교하고, 그 교사에서 교육을 하면서 1951년 8월 중동고등학교를 문교부로부터 인가받아 중학교에 병치하였다.

이후 1952년 11월 서울 관수동(觀水洞)에 중동중 · 고등학교 학생훈육소(學生訓育所)를 개소하고, 다음해인 1953년 4월에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宮井洞) 35번지에 있는 정명여학교(貞明女學校) 자리를 차용하여 중동중 · 고등학교를 개교하였다.

따라서 서울 학생훈육소를 폐소하게 되고, 동년 12월에 본교의 폭격적지(爆擊敵地)인 수송동 85번지에 천막가교사를 설치하고 학교를 이전하였다. 그 후 1954년 3월 부산 분교를 폐지하고 서울 본교로 합교하여 발전하다가 1970년 중 · 고교 분리원칙에 의하여 분리되어 운영되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개화교육연구』(손인수, 일지사, 1980)
『한국근대교육사』(손인수,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1)
『서울교육사』 상·하(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 1981)
『중동중·고등학교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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