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전사관(典祀官) 한우(漢佑)의 아들이다. 1907년 3월 관립 한성한어학교, 1910년 1월 사립 기호학교 사범과를 졸업했다.
1908년 4월 동원여자의숙(東媛女子義塾)을 설립했다. 같은 해 6월에는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를 조직해 사립기호학교를 설립하고, 스스로도 학생으로 입학해 자기완성에 힘썼다. 당시 동원여자의숙의 학생은 모두 11명이었으며, 학비는 전액 무료로 해서 주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국권회복을 꾀하는 데 교육의 중점을 두었다.
1909년 4월에는 동덕여자의숙과 병합하여 동덕여자의숙으로 새출발했으며, 그 뒤 생애를 마칠 때까지 동덕학원 건설에 헌신했다. 1912년에는 동덕여학교의 교장에 취임했는데, 심한 재정난으로 곤란에 처했을 때 손병희 · 이상재 · 이석구 등의 적극적인 협찬으로 교세를 바로잡아 발전했다.
1942년 3월 동덕고등여학교 교장으로서 「매일신보」 에 징병제도의 실시에 부응하여 조선의 여성들에게 ‘군국의 어머니’가 될 것을 역설하는 기고문을 발표하는 등 전쟁협력을 위한 여성의 의무를 강조하고 여학생 교육을 주장했다. 또한 내선일체와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총후생활을 주장하는 기고문을 게재하기도 했다.
해방 후 1950년 5월에는 동덕여자대학을 설립하여 학장에 취임했으며, 그 뒤 동덕학원 이사장으로 재임했다. 이 밖에도 성균관대학의 설립에 참여,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고, 상명여자대학 · 한성여자대학 · 덕성여자대학 · 성신여자대학 등의 이사로 활약했다.
그 뒤 대한교육연합회 회장을 비롯하여 문교재단연합회장, 중앙교육위원회 의장, 대한문교서적주식회사 사장, 한국인쇄주식회사 취체역 회장, 중앙학원 감사, 교육특별심의회 위원, 중앙교육연구소 운영위원장, 전국사립중등학교연합회 회장, 국립서울대학교평의회 부회장 등 수많은 요직을 맡아 우리나라 교육계의 발전을 위하여 크게 공헌했다. 1969년 12월 25일 사망했다.
조동식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3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6: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717∼746)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1969년 11월 제1회 영신(永信)아카데미 교육본상,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