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초명은 민영기(閔泳琦), 자는 기옥(奇玉)으로, 민술호(閔述鎬)의 아들이다. 여은부원군 민태호(閔台鎬)에게 입양되었으며, 순종비인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의 남동생이다.
1892년 문과에 급제하여 시강원 문학에 임명되어 관직생황을 시작하였다. 이후 홍문관 응교, 춘추관 편수관, 태자비궁 대부, 비서원승, 장례원 장례, 궁내부 협판, 홍문관 부학사, 궁내부 특진관, 회계원경, 시강원 담사, 서북 철도국 감독 등을 지냈다.
1904년 예식원 부장으로 승진했으며, 이해 특파일본보빙대사 이지용의 수행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내장원 감독, 예식원 부장, 군부대신 관방장, 동지돈녕원사 겸임 특명전권공사, 비서원경, 궁내부 특진관, 의정부 찬정, 태의원경, 시강원 첨사, 장례원경, 지돈녕사사, 규장각 제학 등을 역임했다. 1909년 4월 경성고아원 원장, 11월 국민대추모회 위원, 12월 국민대연설회 의사회 간사, 사회당 발기인, 진보당 총재 등의 직책을 맡아 활동했다. 1910년 6월 『제국신문』을 인수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대한제국으로부터 1904년 태극장(훈3등), 1906년 태극장(훈2등)을, 일본정부로부터 1904년 서보장(훈2등)을 받았다.
일제강점 이후 일제침략에 협력한 공로로 1910년 10월 조선귀족령에 의거하여 일본정부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1911년 1월 12만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1910년 10월 24일부터 11월 16일까지 일본 천장절 기간에 조선귀족 일본관광단으로 도일하여 일본의 주요시설을 시찰했다. 1914년 경성 숭인학교 교장, 1915년 시정5주년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특별회원, 1917년 친일단체 불교옹호회 고문 등을 맡아 일제 지배정책에 협력했다. 1919년 5월 아편 흡입으로 징역 3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이해 7월 작위를 상실했다. 1932년 6월 1일 사망했다. 일본정부로부터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 1916년 다이쇼[大正]대례기념장을 받았다.
민영린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7·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641∼656)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